포트폴리오: 유럽 주권국에 대한 대출
1755년의 첫 투자는 이후 40년간의 패턴을 정하였다. 위원회는 프랑스 채권, 영국 연금채, 빈 Stadtbank의 증권을 매입하였다.1 이 세 시장은 각각 구별되는 유형의 국가 위험을 대표하였다. 영국 연금채는 의회가 차입을 승인하고 원리금을 상환하는 국가에 대한 청구권이었고, 그 국가의 공채는 1750년대 이래 장기의 “콘솔(Consols)”로 통합되어 있었다. 프랑스 채권은 유럽 대륙에서 가장 크고 정교하지만 가장 취약하기도 한 재정 체계에 대한 청구권이었다. 1705년 12월 24일 황제 칙허로 설립되어 1706년부터 운영된 빈 Stadtbank는 형식상 시립 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채무를 더 유동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이 은행은 후에 군주국 최초의 발권은행이 되었으나, 결국 나폴레옹 전쟁의 압박 속에 파산하였다.2 Stadtbank의 증권을 매입함으로써 취리히 위원회는 빈시의 통제 아래 어느 정도 자율성을 누리던 기관에 대한 청구권을 보유하면서, 간접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에 돈을 빌려준 것이다.
영국은 포트폴리오의 중심축으로 남았다. 후대의 서술에 따르면 영국 정부 연금채는 지속적이고 상당한 구성 요소였으며, 수익률이 3퍼센트를 넘지 않았음에도 그 나라의 정치적 안정과 재정에 대한 의회 통제 때문에 매력적이었다. 위원회는 개인 예금자에게 3.5퍼센트를 지급하였으므로, 영국 연금채만으로는 사업을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국 연금채는 그 주위에 수익률이 더 높은 위험 자산들이 배치되는 안전한 핵심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는 손실에도 불구하고 거듭 투자를 끌어들였는데, 그 금융 체계가 유럽에서 가장 발달하였고 차입자들이 더 높은 이자를 지급하였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는 자산의 5분의 1에서 4분의 1을 차지하였다. 주로 빈 Stadtbank의 채권과, 합스부르크 왕실의 구리청 및 수은청 등 특정 세입을 담보로 한 국가 대출의 형태였다.3
초기에 가장 유명한 단일 거래는 1758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제공한 3만 굴덴의 저당 담보부 대출로, 위원회는 이를 세기말까지 보유하였다.4 은행의 전승은 이 대출을 티롤의 폭풍 피해 복구와 연결지었다.5 그 목적이 무엇이었든, 이 거래는 Bank Leu의 자기 이미지의 일부가 되었다. 의원들로 구성된 취리히의 한 위원회가 7년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중부 유럽 최대 가톨릭 군주국의 군주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은 은행의 후대 홍보물과, 취리히 은행들에 관한 대중적 기억 속에 등장하였다.6 금융 중심지의 역사가에게 이 거래는 개혁파 취리히의 종파적 실용주의를 보여 준다. 취리히는 담보가 확실하기만 하면 가톨릭 군주와 제후 수도원장에게 돈을 빌려주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다른 두 시장은 위원회가 습득한 기술적 지식을 보여 준다. 작센에서 위원회는 분리 가능한 이자 쿠폰이 붙은 무기명 증권을 처음으로 접하였는데, 이는 19세기 유럽 채권시장을 지배하게 될 형식이었다. 덴마크에서는 코펜하겐 은행의 주식을 매입하였는데, 이 은행은 1767년 국가의 구제가 필요해지기 전까지 좋은 배당을 지급하였다.7 덴마크 거래는 또한 다음 절에서 논의하는 중개인 네트워크를 끌어들였다. 독일 지역에서 위원회는 점점 더 많이 제후, 도시, 수도원에 토지와 세입에 대한 저당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었다. 퓌르스텐베르크 제후 한 사람만 해도 1782년까지 위원회에 33만 7,000굴덴의 채무를 지고 있었다. 이는 현대의 어떤 거액 익스포저 규정도 용인하지 않을 단일 차입자에 대한 위험 집중이었다.8 남부 독일의 수도원과 참사회에 대한 대출은 취리히 재무청 자신의 관행을 이어 간 것이다. 제I절에서 언급하였듯이, 재무청은 17세기 말부터 그러한 차입자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왔다.
위원회 대차대조표의 성장은 대략적인 수치로 추적할 수 있다. 예금은 1758년 18만 3,000굴덴, 1762년 48만 2,000굴덴에 이르렀다. 1770년까지 100만 굴덴의 문턱을 넘었고, 1780년까지 200만 굴덴에 도달하였으며, 혁명 직전인 1797년에는 총액이 약 270만 굴덴이었다.9 이는 암스테르담이나 런던 상회들의 기준으로는 소박한 금액이며, 제VII절에서 논의하는 베른의 국가 보물에 비하면 작다. 그러나 취리히에서 이 금액은 도시의 기관들과 유력 가문들이 보유한 유동 자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고, Zinskommission(이자위원회)을 취리히의 저축이 유럽 자본시장에 도달하는 주된 경로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단편들에서 드러나는 투자 정책은 오늘날 공적 투자자의 지침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네 가지 원칙에 기초한다. 첫째는 영국 의회에서 합스부르크 왕실까지, 덴마크 은행에서 슈바벤 수도원까지 국가와 차입자 유형에 걸친 분산이었다. 둘째는 의회 보증, 특정 세입, 토지 저당 등 어떤 형태로든 안전장치를 선호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예금자에게 지급하는 이율과 투자에서 얻는 이율 사이의 차익으로, 이것으로 위원회의 비용을 충당하고 준비금을 쌓았다. 넷째는 덜 명시적이지만, 금융 중심지에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거래처의 활용이었다. 이들은 정보를 제공하고 매입을 실행하며 이자를 수취하였다. 이 모델의 약점은 주요 차입자들이 교전국이었다는 데 있었다. 18세기 후반의 모든 전쟁, 그리고 무엇보다 1792년 이후의 혁명전쟁은 위원회가 의존하던 채무의 원리금 상환을 위협하였다.
주석
- Saller, “Rathausobligationen: Die Bank Leu, Teil drei”, 앞의 글. ↩
- Wikipedia, “Wiener Stadtbank”, https://en.wikipedia.org/wiki/Wiener_Stadtbank (방향 파악을 위해 참고). 이 항목은 이 은행이 1811년 폐쇄되었으며 예금자들이 큰 손실을 입었다고 기술한다. ↩
- 포트폴리오에서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가 차지한 위치와 구리청 및 수은청에 관하여는 Saller, Ein kurze Geschichte der Bank Leu, 앞의 글. 또한 Saller, “Rathausobligationen: Die Bank Leu, Teil drei”, 앞의 글 및, 영국 투자의 3퍼센트 수익률 상한에 관하여는 Saller, “50 Prozent Eigenkapital: Die Bank Leu, Teil zwei”, 앞의 글 참조. ↩
- Saller, “Rathausobligationen: Die Bank Leu, Teil drei”, 앞의 글. 잘러는 이 채권을 저당 담보부이자 위원회의 유명한 투자 가운데 하나로 기술한다. ↩
- 필자 미상 기사 “Das Aus für die Bank Leu nach 256 Jahren”, St. ↩
- Gebrüder Dürst, “Namen alter und ehemaliger Bankhäuser in der Stadt Zürich”, https://www.gebrueder-duerst.ch/turicum/adressbuch/bank/ehemalige_banken.html. ↩
- Saller, Ein kurze Geschichte der Bank Leu, 앞의 글. ↩
- Saller, “Rathausobligationen: Die Bank Leu, Teil drei”, 앞의 글. ↩
- Saller, “Rathausobligationen: Die Bank Leu, Teil drei”, 앞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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