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취리히 전쟁과 동부 교역로를 둘러싼 투쟁
토겐부르크 상속
15세기 취리히의 핵심적인 정치적 위기는 근본적으로 동부 교역 회랑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1370년경 태어난 토겐부르크 백작 프리드리히 7세는 취리히호와 라인 계곡 사이에 상당한 영역 복합체를 구축하였다. 스위스 역사사전(HLS)은 그를 당대에 가장 성공한 귀족 군사기업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1406년까지 그는 자르간스, 빈덱, 프로이덴베르크와 니드베르크를 담보로 보유하였고, 1417년에는 펠트키르히를, 1424년에는 라이네크와 알트슈테텐을 획득하였다.1 그의 영지에는 발렌호 회랑의 요충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곧 빈덱과 베젠을 포함한 가스터, 취리히호 상단의 우츠나흐 백작령, 그리고 발렌호 동쪽 끝의 자르간스였다. 이것들을 상속하는 자는 취리히에서 쿠어에 이르는 교역로를 장악하게 될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1436년 4월 30일 펠트키르히에서 자녀 없이 사망하였는데, 한 서술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유산에 관하여 부분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많은 약속을 남겼다.2 그와 Burgrecht(시민권 조약)를 체결하였던 취리히는 동쪽으로의 접근을 확보해 줄 상속분을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그와 Landrecht(지방민권 조약)를 체결하였던 슈비츠와 글라루스가 다투었다. Martin Illi가 집필한 HLS의 이 전쟁에 관한 항목은 취리히가 법적으로 더 강한 지위에 있었으나 슈비츠와 글라루스가 승리하여, 가스터의 오스트리아령 우츠나흐와 빈덱, 그리고 간접적으로 자르간스를 얻었다고 기술한다.3 같은 항목에 따르면 이 도시는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농촌 주(칸톤) 슈비츠와 이해관계의 충돌에 휘말렸는데, 린트 평야, 상부 호수, 아인지델른으로 가는 순례길에 대한 슈비츠 자신의 이해관계도 그에 못지않게 강하였다.4 1437년 11월 14일 펠트키르히에서 체결된 상속 분할로 취리히는 자신이 추구하던 것을 하나도 얻지 못하였다.
곡물 금수와 전쟁
취리히의 대응은 군사적이기에 앞서 경제적이었다. 흉작이 든 1438년, 도시는 곡물 수출을 제한하였고 이어 슈비츠와 글라루스에 대해 교역 금지 조치를 부과하였다.5 이 조치는 알프스의 주들이 저지대의 곡물에 의존하고 있었고 취리히 시장이 그 주된 공급원이었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는 시장과 교역로의 통제가 정치적 무기라는 것을 더할 나위 없이 직접적으로 보여 준 사례였다. 그러나 그것은 역효과를 낳기도 하였다. 이 조치는 취리히가 자신들을 희생시켜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농촌 주들의 견해를 굳혀 주었고, 동부 회랑을 지키려는 그들의 결의를 더욱 단단하게 하였다. 적대 행위는 1439년 5월 에첼에서 시작되었다. 1440년 가을 취리히군이 패피콘 부근에서 궤멸된 뒤, 1440년 말 체결된 킬히베르크 평화조약은 취리히로 하여금 회페와 우페나우섬을 슈비츠에 할양하도록 하였다.6
연방 안에서 고립된 취리히는 합스부르크가로 눈을 돌렸다. 1442년 6월 17일 도시는 프리드리히 3세 국왕과 동맹을 체결하였는데, 여기서 키부르크 백작령의 북부를 할양하고 그 대가로 국왕이 토겐부르크와 우츠나흐 백작령을 취리히에 확보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7 1447년 프리드리히 3세가 취리히에 리마트강과 라인강 하류로의 통행세 면제 항행 특권을 부여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8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은 다른 연방 구성원들에게 배신으로 여겨졌다. 재개된 전쟁에서 취리히군은 1443년 7월 22일 장크트야코프 안 데어 질에서 패배하였고, 이때 시장 루돌프 슈튀시가 전사하였다. 이어 연방 구성원들은 1444년 그라이펜제를 포위하여 그 수비대를 처형하였고, 취리히를 포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1444년 8월 26일 장크트야코프 안 데어 비르스에서 아르마냐크군에게 궤멸되었다.9
전쟁은 부분적으로 물 위에서 치러졌다. 취리히는 무장선과 전투용 뗏목으로 호수에서의 우위를 유지하며 포위된 라퍼스빌과 도시 자체에 물자를 보급하였고, 1445년 10월 29일 매네도르프 앞바다의 수상 전투는 그 우위를 확인해 주었다. 이렇게 뱃사공 길드와 그 선박들은 전쟁의 도구가 되었다. 도시가 그 교역을 통제하려 하였던 호수는 전선이 되었다. 같은 서술은 파괴의 규모와, 바젤·취리히·그라우뷘덴 고개들 사이의 교역 흐름이 여러 해 동안 중단된 것이 전쟁 피로감과 양측의 타협 의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고 강조한다.10
강화와 그 상업적 결과
1446년에 휴전이 성립하였다. 최종 해결은 중재를 통해 이루어졌다. 예비 절차를 거친 뒤, 베른의 Schultheiss(시장) 하인리히 폰 부벤베르크가 1450년 7월 13일 아인지델른에서 결정적인 중재판정을 내렸고, 이 판정은 취리히로 하여금 합스부르크 동맹을 포기하고 킬히베르크 평화조약의 조건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1450년 8월 24일 연방 구성원들과 취리히는 아인지델른에서 선서로 동맹을 갱신하였다.11 취리히는 슈비츠에 남은 회페를 제외한 영역을 회복하였다.12
교역로에 있어 그 결과는 결정적이었다. 우츠나흐와 가스터는 슈비츠와 글라루스에 남았고, 이는 취리히–쿠어 노선 전체가 두 농촌 주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의미하였다.13 발렌슈타트는 1462년의 중재로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분리되어 베른을 제외한 연방의 주들 아래에 놓였다. 1483년 연방 구성원들은 자르간스 백작령을 획득하였고, 이후 1798년까지 이를 공동 지배령으로 관리하였다.14 이렇게 취리히는 1436년에 추구하였던 동부 회랑의 배타적 통제를 끝내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 회랑은 연방의 교역로가 되었고, 취리히는 그 안에서 이웃들과 권리와 책임을 나누었다. 1498년 슈비츠, 글라루스와 취리히가 합의한 린트강과 발렌호의 항행 규정은 이 새로운 질서의 실제적 표현이었다.15
이 전쟁이 취리히의 경제 발전에 대해 지니는 장기적 의미는 상당하였다. HLS의 주에 관한 항목은 1450년의 평화가 취리히에게 연방 체제 밖의 정치적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확정하였다고 결론짓는다.16 HLS의 전쟁에 관한 항목은, 이 분쟁이 여러 주역들의 원래 의도와 달리 스위스 지역의 정치적 상황을 공고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역설을 강조한다.17 교역 도시에게 이는 앞으로 교역로에 대한 접근이 동맹, 중재와 조약을 통해 확보될 것임을 의미하였다. 도시는 고개들에 이르는 영역적 회랑이라는 꿈을 잃었으나, 그 안에서 교역을 영위할 수 있는 안정된 정치적 틀을 얻었다. 이 책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후자가 전자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었다.
주석
- Erwin Eugster, “Toggenburg, Friedrich VII. von”, in: HLS, https://hls-dhs-dss.ch/de/articles/029257/: “einer der erfolgreichsten adligen Militärunternehmer seiner Zeit”. ↩
- “Alter Zürichkrieg”, 독일어 위키백과, https://de.wikipedia.org/wiki/Alter_Z%C3%BCrichkrieg. 개관을 위해 인용한다. 사망일은 Eugster, “Toggenburg, Friedrich VII. von”, HLS(앞의 글)에서 확인된다. ↩
- Martin Illi, “Zurich, ancienne guerre de”, in: DHS/HLS(프랑스어판), https://hls-dhs-dss.ch/fr/articles/008877/. ↩
- Illi, “Zurich, ancienne guerre de”, HLS(앞의 글): 슈비츠와의 관계에서 “La ville se tourna donc vers l’est et s’engagea dans un conflit d’intérêts”. ↩
- Illi, “Zurich, ancienne guerre de”, HLS(앞의 글). 1438년의 곡물 수출 제한과 그에 이은 교역 금지에 관하여. ↩
- Illi, “Zurich, ancienne guerre de”, HLS(앞의 글). 독일어 위키백과 항목은 킬히베르크 평화조약의 일자를 1440년 12월 1일로 제시한다. ↩
- “Alter Zürichkrieg”, 독일어 위키백과(앞의 글); 동맹의 일자에 관하여는 Illi, “Zurich, ancienne guerre de”, HLS(앞의 글). ↩
- Illi, “Limmat”, HLS(앞의 글). ↩
- Illi, “Zurich, ancienne guerre de”, HLS(앞의 글); 장크트야코프 안 데어 질 전투의 일자에 관하여는 “Geschichte der Stadt Zürich”, 독일어 위키백과(앞의 글); 장크트야코프 안 데어 비르스 전투에 관하여는 “Alter Zürichkrieg”, 독일어 위키백과(앞의 글). ↩
- “Alter Zürichkrieg”, 독일어 위키백과(앞의 글). ↩
- “Alter Zürichkrieg”, 독일어 위키백과(앞의 글). 이보다 앞선 1447년 2월 28일 아우크스부르크 시장 페터 폰 아르군의 중재 결정은 취리히의 연방 동맹이 그 법적 효력을 결코 잃은 적이 없다고 확정하였다. ↩
- Illi, “Zurich, ancienne guerre de”, HLS(앞의 글). ↩
- “Alter Zürichkrieg”, 독일어 위키백과(앞의 글). 이 항목은 취리히–쿠어 교역로 전체가 이 두 주의 수중에 있었다고 서술한다. ↩
- Gubser, “Walenstadt”, HLS(앞의 글). ↩
- “Linth (Fluss)”, HLS(앞의 글); Kuratli Hüeblin, “Walensee”, HLS(프랑스어판, 앞의 글). ↩
- Suter, “Zürich (Kanton)”, HLS(앞의 글). ↩
- Illi, “Zurich, ancienne guerre de”, HLS(앞의 글): 이 전쟁은 “amena, contrairement aux intentions originelles de plusieurs de ses protagonistes, une consolidation de la situation politique dans l’espace suis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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