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들과 그 통합의 조건
누가 왔는가: 망명 공동체의 초상
취리히의 로카르노 공동체는 규모가 작고 사회적으로 다양하였으며 혈연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레오 바이스(Leo Weisz)가 분석한 기록에는 무엇보다 로도비코 론코(Lodovico Ronco)와 그의 자녀들, 과르네리오 카스틸리오네(Guarnerio Castiglione), 안드레아 체비오(Andrea Cevio), 자코모 자레토(Giacomo Zaretto), 아내와 두 아들 및 딸과 함께 온 알로이시오 오렐리(Aloisio Orelli)와 그의 사촌 바르톨로메오(Bartolomeo)와 필리포(Filippo), 형제 파올로(Paolo) 및 지롤라모(Girolamo)와 함께 온 에반젤리스타 자니노(Evangelista Zanino), 타데오 두노(Taddeo Duno)와 그의 형제 자코모(Giacomo), 그리고 아들 잔자코모(Giangiacomo) 및 프란체스코(Francesco)와 함께 온 외과의사 조반니 무랄토(Giovanni Muralto)의 이름이 나온다.1 여기에 아피아니(Appiani) 가문을 더해야 한다. 이 가문은 비단 염색 기술을 취리히에 도입한 것으로 평가되며, 취리히와 바젤의 비단 교역에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2 또한 페비아(Pebbia) 가문도 더해야 하는데, 이 이름은 베르가모에서 그곳의 비단 및 직물 교역에 종사한 취리히 가문들 가운데 베비아(Bebia)로 나타난다.3 이 도시의 피난민 역사에 관한 오늘날의 안내 자료들은 두노, 자니노, 무랄트, 오렐리, 페비아를 로카르노 출신의 핵심 가문으로 꼽으며, 여기에 키아벤나 출신의 페스탈로치(Pestalozzi) 가문을 함께 든다.4
페스탈로치 가문은 로카르노 출신이 아니었지만, 그 역사는 망명자들의 역사와 분리할 수 없다. 요한 안톤 페스탈로치(Johann Anton Pestalozzi)는 1550년경 키아벤나에서 취리히로 와서 1567년 시민권을 얻었고, 아마포, 면직물, 벨벳, 비단을 취급하는 직물 상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1579년 이후 이 가문은 비단의 교역과 가공에 특화하였으며, 그 상업 네트워크는 밀라노, 리옹, 아우크스부르크에까지 이르렀다.5 그는 혼인을 통해 로카르노 집단과 결합하였다. 1578년 프란체스코 무랄토의 막내 누이 막달레나 무랄토(Magdalena Muralto)가 그의 아내가 되었고, 젊은 무랄토 형제들은 상업 수련의 일부를 알로이시오 오렐리, 자코모 두노, 그리고 그들의 삼촌 안토니오 페스탈로치(Antonio Pestalozzi) 밑에서 받았다.6 이러한 혼인과 도제 관계는 피난민 가구들의 집단을 하나의 상업 네트워크로 바꾸어 놓았고, 그 안에서 자본, 신용, 정보, 신뢰가 친족들 사이를 순환하였다. 이는 제네바 피난민(Refuge)의 역사가들과 머천트 뱅킹 일반의 역사가들이 근세 금융의 사회적 토대로 지목하는 것과 같은 유형이다.
온 사람 모두가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머무를 수 있었던 사람 모두가 번영한 것도 아니다. 경제사가 게어링(Geering)은 취리히의 서투른 피난민 정책이 도시에 빈민과 심지어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떠안겼다고 보았다. 대체로 피난민들에게 호의적인 바이스도 이 오래된 견해가 로카르노 주민들의 경우에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였다. 다만 어디까지나 일말의 진실일 뿐이었다. 1558년의 제한적 조례 이후 금리생활자 대부분과 여러 직종을 겸하던 수공업자 전원이 장애가 더 적은 바젤로 떠났으며, 취리히에 남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부양이 필요한 미성년 자녀를 둔 독신 여성이 많았다. 바이스의 판단에 따르면 제2세대 가운데 특히 유능한 다섯 명만이 수십 년이 지나서야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7 따라서 부유한 피난민 엘리트가 재산을 고스란히 로카르노에서 취리히로 옮겨 왔다는 상(像)은 수정되어야 한다. 로카르노 주민들이 가져온 자본은 무엇보다 사회적·상업적 자본, 즉 이름, 인맥, 언어, 시장과 기술에 관한 지식이었다. 금전 자본은 흔히 취리히 상인들과 동업하면서 다시 쌓아 올려야 했다.
동업조합 권리 없는 힌터자센: 1558년 조례
피난민들의 법적 지위는 거주와 시민권에 관한 시 평의회의 정책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들은 힌터자센(Hintersassen), 즉 도시의 보호를 받지만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결정적으로는 동업조합에서 배제된 거주민으로 받아들여졌다. 동업조합이 수공업과 소매업에 대한 진입을 통제하였으므로, 이러한 배제가 로카르노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규정하였다. 결정적인 규율은 1558년에 나왔다. 1558년 7월 10일 상인과 소매상의 동업조합인 사프란 동업조합(Zunft zur Saffran)은 로카르노 출신 가장 여섯 명을 가구당 연 2파운드를 납부하는 조건으로, 동업조합 권리가 없고 당국이 정한 제한을 받는 배정 거주민으로 받아들였다.8 이 여섯 명은 수입품만 거래할 수 있었는데, 국내 산품의 판매는 시민에게 유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로카르노 주민들은 원거리 교역으로 유도되었다. 원거리 교역은 그들이 취리히 수공업자들과 경쟁하지 않는 유일한 분야였고, 그들의 이탈리아 인맥이 비교우위를 제공하는 분야였다.
이 제한은 그 입안자들이 예견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취리히에서는 1522년부터 상업 결사의 금지가 시행되고 있었다. 이탈리아식 가족 동업과 결사로 조직된 로카르노 출신 상사들은 이 금지에 균열을 냈다. 바이스는 그들이 사프란 동업조합에 불어넣은 새로운 정신, 곧 빠르게 성장하는 교역과 함께 들어온 외국의 기술과 산업이 도시의 번영을 끌어올린 점을 그들의 가장 중요한 기여 가운데 하나로 본다.9 론코 상사는 그 초기 사례이다. 이 상사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쌀을 수입하고 츠빌히(Zwilch, 두꺼운 아마 직물), 리본, 벨벳을 수출하였다. 사업 동료에는 소(小) 야코프 베르트뮐러(Jakob Werdmüller)와 카스파어 뷔스트(Caspar Wüst)가 있었으며, 이로써 이 상사는 로카르노 출신 상인과 취리히 상인 사이에 기록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상업적 연결 가운데 하나가 된다. 다만 그 정확한 형태를 보여 줄 계약서나 회계장부는 남아 있지 않다.
1558년 이후의 바젤 이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라인강 변의 이 도시는 더 개방적이었다. 바젤은 새로 온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더 쉽게 부여하였고, 가벼운 면직물 업종(Tüchligewerbe)을 누구에게나 개방하였다. 알로이시오의 사촌인 바르톨로메오 오렐리와 필리포 오렐리는 몇 달 만에 바젤 시민으로 받아들여졌는데, 바르톨로메오는 1559년, 필리포는 1560년이었다. 스위스 도시에서 완전한 시민 지위를 얻은 최초의 로카르노 출신으로서, 그들은 시민의 관세 특권을 누리며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상품을 수출할 수 있었다. 과르네리오 카스틸리오네는 론코 상사가 해산된 뒤 바젤로 옮겨 1567년 시민이 되었고 비단 사업을 일으켰다. 벨벳 직조공 로바초토(Robazotto)는 1568년의 벨벳 조례 이후 그 뒤를 따랐고, 1570년 바젤 시민으로 받아들여졌다.10 개신교 피난민에 관한 「스위스 역사사전」(HLS)의 항목은 전체적인 상을 확인해 준다. 취리히와 바젤에서 이탈리아 및 로카르노 출신 개혁파는 동업조합이 직물 분야의 경쟁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상당한 저항에 부딪혔다. 소수의 가문(바젤의 베르누이, 르그랑, 사라생 가문과 취리히의 오렐리 가문)만이 시민권을 얻었고, 나머지는 기존 주민의 경제 활동을 보완하는 경제 활동을 발전시켰다.11
시민권: 예외와 원칙
시민권은 완전한 경제적 자유로 가는 열쇠였고, 그렇기 때문에 취리히 평의회들은 시민권을 그토록 엄격하게 지켰다. 대평의회는 로카르노 주민들이 취리히의 시민 생활에 녹아드는 법을 모르며, “welsch” 혈통이어서 천성적으로 복수심이 강하고 폭력적인 성향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시민권 부여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565년 4월 평의회는 예외를 허용하였다. 현지 후보자가 없을 때에는 소평의회가 숙련 수공업자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이 로카르노 주민들에게 적용된 경우는 드물었다.12
첫 번째 예외는 조반니 무랄토였다. 1566년 1월 그와 그의 아들들은 페스트 유행 기간 중 그가 제공한 유익한 봉사를 인정받아 시민권을 선물로 받았다. 이 부여가 아들들에게 외과 의술에 종사할 의무를 지우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교역에 뛰어들었다. 그는 취리히 시민권을 받은 최초의 종교 피난민이었으며, 이 수용은 로카르노 출신의 다른 가문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13 두 번째는 에반젤리스타 자니노로, 그는 형제와 함께 1567년 1월 2일 시민이 되었다. 공식적인 근거는 이탈리아 직물 기술을 도입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노동자를 모집한 공로였으나, 바이스는 실제 동기가 자니노의 사업에 맡겨진 취리히 자본의 보호에 있었다고 본다. 시민권 부여에 사프란 동업조합의 조합원 자격이 따랐으므로, 자니노 형제는 완전한 특권을 지닌 최초의 로카르노 출신 동업조합원이 되었다.14
오렐리 가문은 훨씬 더 오래 기다려야 했다. 알로이시오는 1572년 7월 13일 시민권 없는 거주민으로서 취리히에서 사망하였다.15 그의 아들들은 1592년 제한적 시민권을 받았으나, 이는 완전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완전한 시민권 신청은 1606년, 1639년, 1673년에 거부되었다. 1679년에 이르러서야 대평의회는 가문의 모든 분파에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였는데, 그것도 오렐리 가문이 베른으로 이주하겠다고 위협한 뒤의 일이었다.16 이렇게 이 가문은 완전한 시민적 평등을 얻기까지 120년 이상을 기다렸다. 마르티노 무랄토의 아들 한스 루트비히(Hans Ludwig)가 세운 무랄트 가문의 베른 분파는, 그가 베른의 행정관 베아트 루트비히 폰 뮐리넨(Beat Ludwig von Mülinen)의 딸 마리아 폰 뮐리넨(Maria von Mülinen)과 혼인한 뒤 이미 1570년에 베른 시민권을 받았다.17 30년에 걸친 상업 활동 끝에 1586년까지 1만 6,000굴덴의 재산을 모은 로렌초 페비아(Lorenzo Pebbia)는 시민권을 얻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18
이처럼 로카르노 주민들에 대한 취리히의 시민권 정책은 선별적이고 공적에 기반하며 매우 더딘 수용 정책이었다. 페스트 유행 중에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의사, 취리히의 자금을 맡아 운용하던 상사를 가진 기업가, 그리고 마침내 잃기에는 너무 중요한 상인 가문, 이들이 평의회가 문을 연 사례였다. 수용이 입증된 유용성에 뒤따르고, 경쟁 관할권으로 떠나겠다는 위협이 신청인의 입지를 강화하는 이 논리는 취리히 역사의 후대 여러 장에서 되풀이된다. 1679년 베른으로 이주하겠다는 오렐리 가문의 위협은 이동성 있는 자본을 둘러싼 스위스 도시 간 규제 경쟁의 초기 사례이다. 이는 주(칸톤) 간 패밀리 오피스나 지주회사의 이전에 관해 자문해 본 실무가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현상이다.
주석
- Weisz, “Die wirtschaftliche Bedeutung der Tessiner Glaubensflüchtlinge”(앞에서 인용). ↩
- HLS, 이탈리아어판, “Appiani”(앞에서 인용). ↩
- HLS, 이탈리아어판, Martin Bundi, “Bergamo”, 2002년 6월 20일 판, https://hls-dhs-dss.ch/it/articles/007028/2002-06-20/. ↩
- Hutzl-Ronge, “Locarner Glaubensflüchtlinge & die Reformation in Zürich”(앞에서 인용). ↩
- HLS, 이탈리아어판, “Pestalozzi (ZH)”, https://hls-dhs-dss.ch/it/articles/023830/. ↩
- Weisz, “Die wirtschaftliche Bedeutung der Tessiner Glaubensflüchtlinge”(앞에서 인용). ↩
- Weisz, “Die wirtschaftliche Bedeutung der Tessiner Glaubensflüchtlinge”(앞에서 인용). ↩
- Weisz, “Die wirtschaftliche Bedeutung der Tessiner Glaubensflüchtlinge”(앞에서 인용). ↩
- Weisz, “Die wirtschaftliche Bedeutung der Tessiner Glaubensflüchtlinge”(앞에서 인용). 1522년의 금지는 취리히 종교개혁의 초기 단계에 속한다. 독점과 대규모 무역회사에 대한 종교개혁가들의 의구심에 관해서는 B.III장 참조. ↩
- Weisz, “Die wirtschaftliche Bedeutung der Tessiner Glaubensflüchtlinge”(앞에서 인용). ↩
- HLS, 이탈리아어판, Danièle Tosato-Rigo, 개신교 피난민에 관한 항목(독일어판: “Protestantische Glaubensflüchtlinge”), 2014년 12월 12일 판, https://hls-dhs-dss.ch/it/articles/026884/. ↩
- Weisz, “Die wirtschaftliche Bedeutung der Tessiner Glaubensflüchtlinge”(앞에서 인용). “Welsch”는 이탈리아인과 프랑스인을 막론하고 로망스어를 쓰는 외국인을 가리키는 독일어의 일반적인 용어였다. ↩
- Wikipedia(영어판), “Johannes Muralt”(앞에서 인용); Wikipedia(독일어판), “Muralt (Adelsgeschlecht)”, https://de.wikipedia.org/wiki/Muralt_(Adelsgeschlecht). 후자는 시민권 부여일을 1566년 1월 31일로 기재한다. ↩
- Weisz, “Die wirtschaftliche Bedeutung der Tessiner Glaubensflüchtlinge”(앞에서 인용); HLS, 프랑스어판, Martin Lassner, “Zanino, Evangelista”, 2012년 5월 21일 판, https://hls-dhs-dss.ch/fr/articles/028581/. ↩
- Wikipedia(영어판), “Aloisio Orelli”(앞에서 인용). ↩
- HLS, 이탈리아어판, Huber and Illi, “Orelli”(앞에서 인용). ↩
- Dürmüller, “Migranten von einst”(앞에서 인용); HLS, 이탈리아어판, Martin Illi, “Muralt”, https://hls-dhs-dss.ch/it/articles/049224/. ↩
- Weisz, “Die wirtschaftliche Bedeutung der Tessiner Glaubensflüchtlinge”(앞에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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