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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수진: 국제적인 교수단

독일과 그 밖의 지역에서의 인재 초빙

폴리테크니쿰은 스위스 자체의 인력만으로는 교수직을 채울 수 없었다. 1850년대의 스위스에는 국제적 수준의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드물었기 때문에, 학교위원회는 해외, 무엇보다 독일 여러 나라에서 체계적으로 인재를 초빙하였다. 1848년과 1849년의 혁명으로 유능한 학자들 다수가 망명하거나 본국에서 곤경에 처하였고, 취리히는 그들에게 신분 보장, 상당한 급여, 그리고 자유주의적 정치 풍토를 제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ETH의 역사가들은 그 이름이 해외 학생들을 끌어들인 교수로 고트프리트 킨켈(Gottfried Kinkel), 프란체스코 데 상크티스(Francesco De Sanctis), 프리드리히 테오도어 피셔(Friedrich Theodor Vischer), 빅토르 셰르뷜리에(Victor Cherbuliez),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카를 쿨만(Karl Culmann), 프란츠 뢸로(Franz Reuleaux), 고트프리트 젬퍼를 꼽는다.1 이 명단에는 엔지니어와 자연과학자뿐 아니라 시인, 문학사가, 철학자가 섞여 있다. 이는 1854년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일반 학부가 진지하게 운영되었으며, 학교위원회가 이를 이용하여 취리히에 문화적 명성을 가져왔음을 보여 준다.

학생 구성의 국제성은 교수진의 국제성과 상응하였다. 개교 후 처음 수십 년 동안 외국인 교직원과 학생의 높은 비율은 이 학교의 결정적 특징으로 남았다. 어떤 해에는 학생의 절반 이상이 스위스 밖에서 왔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출신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2 이렇게 하여 취리히는 1855년 이후 한 세대 안에 중부 및 동부 유럽 대부분 지역의 젊은이들이 직업적 자격을 취득하는 곳이 되었다. 그들 중 다수는 귀국하면서 개인적 인맥과 스위스 제도에 대한 친숙함을 함께 가져갔다. 이는 이후 그 나라들에서 고객과 협력자를 찾던 스위스 산업 기업과 금융 기업에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엔지니어와 물리학자: 쿨만, 뢸로, 초이너, 클라우지우스

1821년 팔츠 지방 베르크차베른에서 태어난 카를 쿨만은 1855년 공학 교수로 취리히에 초빙되어 1881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을 유지하였다. 그는 1849년부터 1851년까지 미국을 여행하였으며, 미국의 목조 교량과 영국 및 미국의 철제 교량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866년의 주저 Die graphische Statik은 보, 교량, 지붕 트러스, 아치, 옹벽의 해석을 위한 도해적 방법을 도입하였다. 쿨만의 방법은 그의 제자였던 모리스 쾨슐랭(Maurice Koechlin)이 에펠탑을 설계하는 데 적용하였다.3 철도 건설의 시대에 도해 정역학은 즉각적인 경제적 가치를 지닌 기술이었다. 이 기술은 엔지니어들이 교량과 고가교를 신뢰성 있고 저렴하게 계산할 수 있게 함으로써, 철도회사 투자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기술적 위험을 줄였다.

1829년 아헨 근교에서 태어난 프란츠 뢸로는 1856년 취리히에 와서 1864년 베를린의 영업아카데미(Gewerbeakademie)로 떠날 때까지 기계공학을 가르쳤다. 그는 역학 학과에서 구스타프 초이너(Gustav Zeuner)와 함께 일하였으며, 기계공학을 그 수학적 기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정립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편람 Der Konstrukteur와,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후기의 이론 기구학은 그를 체계적 기계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4 구스타프 초이너 자신은 1855년 기술역학 교수로 취리히에 왔다. 그는 1859년부터 학교의 교장 직무를 수행하였고 1865년 5월부터는 정식으로 교장직을 맡았으며, 1871년 독일로 돌아갔다.5 아래에서 보험수학과 관련하여 다시 등장할 그의 인구통계에 대한 관심은, 초기 폴리테크니쿰의 엔지니어들이 역학, 열역학, 사망률의 수학 사이를 얼마나 자유롭게 넘나들었는지를 보여 준다.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는 1855년부터 1867년까지 취리히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그가 1865년 엔트로피 개념을 도입하고 그 이름을 붙인 논문을 발표한 것도 취리히 시절의 일이었으며, 이는 열역학의 기초를 이룬 공헌 가운데 하나이다.6 열역학은 증기기관과 이후 터빈의 이론적 기초였다. 열역학을 최고 수준에서 가르친 학교는 효율을 정량적으로 이해하는 엔지니어들을 스위스 북동부의 기계 제조업에 공급하였다. 클라우지우스의 강의실과 Escher Wyss나 Sulzer의 수주 장부 사이의 연관은 간접적이었지만 추적할 수는 있다. 이론적 정교함은 국제 시장에서 스위스 기계의 판매 포인트가 되었다.

수학자: 데데킨트, 크리스토펠, 프로베니우스

처음 몇 해 동안 수학은 여섯 번째 학부에서 물리학 및 자연과학과 나란히 보조 학문의 역할을 하였다. 카펠러가 위원장으로 있던 시기에 학교위원회는 그 지위를 바꾸었다. 디리클레(Dirichlet)의 추천을 받은 리하르트 데데킨트(Richard Dedekind)는 1858년부터 1862년까지 취리히에서 가르치며 미적분학에 관한 포괄적인 강의를 하였다. 그는 폴리테크니쿰에서 경력을 시작한 뒤 독일의 영향력 있는 교수직으로 옮겨 간 여러 젊은 독일 수학자 가운데 첫 번째였다. 그의 후임으로 1862년부터 1869년까지 가르친 엘빈 브루노 크리스토펠(Elwin Bruno Christoffel)은 수학 세미나를 도입하였으며, 이 세미나에서 수학은 공학에서의 응용과 관계없이 독립된 학문으로 연구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여섯 번째 학부를 수학·과학 교사 양성을 위한 학과로 개편하는 데로 이어졌다.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프로베니우스(Georg Ferdinand Frobenius)는 1875년부터 1892년까지 수학 세미나를 이끌었다. 그가 베를린으로 떠났을 때, 학교위원회 의사록에는 그의 이임이 큰 손실로 기록되었다.7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폴리테크니쿰에서 가르친 수학자들의 명단은 이 학문의 명예의 전당처럼 읽힌다. 여기에는 요제프 루트비히 라베(Joseph Ludwig Raabe), 리하르트 데데킨트, 엘빈 브루노 크리스토펠, 카를 테오도어 라이에(Carl Theodor Reye), 헤르만 아만두스 슈바르츠(Hermann Amandus Schwarz), 하인리히 베버(Heinrich Weber),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프로베니우스, 프리드리히 쇼트키(Friedrich Schottky), 아돌프 후르비츠(Adolf Hurwitz),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헤르만 바일(Hermann Weyl), 조지 포여(George Pólya)가 포함된다. 1912년에는 학교 교수의 약 10퍼센트가 수학자였다.8 작은 도시에 이처럼 수학적 재능이 집중된 것은 순수 과학을 훨씬 넘어서는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정량적 추론이라는 지역적 전통을 만들었고, 이 전통은 이후 보험계리학, 통계학, 운영연구, 그리고 20세기 후반에는 계량금융을 길러 냈다.

기술학교의 인문학자들: 데 상크티스, 부르크하르트, 피셔, 킨켈

일반 학부는 폴리테크니쿰에 카를스루에나 뮌헨의 기술학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교수진을 안겨 주었다. 망명 중이던 나폴리의 자유주의자 프란체스코 데 상크티스는 이탈리아 문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1856년 3월 취리히에 도착하였다. 그는 1856년 4월 24일 단테의 Commedia에 관한 강의를 시작하였고, 이어 페트라르카, 폴리치아노, 마키아벨리, 만초니, 레오파르디, 아리오스토에 관하여 강의하였다. 1858년과 1859년의 페트라르카 강의는 이 시인에 관한 그의 후일의 에세이의 토대가 되었다. 그의 취리히 시절 전체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History of Italian Literature를 준비한 기간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 후 나폴리로 돌아가기 위하여 1860년 8월 6일 취리히를 떠났다. 장래의 엔지니어를 가르치는 그의 원칙은 자주 인용되어 왔다. 그들은 엔지니어이기에 앞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9

바젤의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는 1855년부터 1858년까지 3년간 취리히 폴리테크니쿰에서 가르친 뒤 고향 도시로 돌아갔으며, 그곳에서 그를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역사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든 저작들을 썼다.10 초기 교수진 가운데 그가 있었다는 사실은 표준적인 역사 백과사전에서 확인되며, 이 사전은 그를 젬퍼와 함께 학교의 가장 저명한 초기 교수로 꼽는다.11 그는 미술사 강좌를 맡았으며, 이 과목은 건축학교에서의 젬퍼의 교육을 보완하였다.12 슈바벤의 미학자 프리드리히 테오도어 피셔와 독일의 시인이자 민주주의자 고트프리트 킨켈도 폴리테크니쿰에 이례적으로 폭넓은 지적 생활을 부여한 같은 교수 집단에 속하였다.13 같은 명단에 있는 셰르뷜리에라는 이름은 아마도 제네바의 경제학자 앙투안엘리제 셰르뷜리에(Antoine-Élisée Cherbuliez, 1797–1869)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장바티스트 세(Jean-Baptiste Say)의 전통에 선 자유주의자로서, 로잔에서 가르친 뒤 연방 폴리테크닉 학교 최초의 정치경제학 강좌에 임용되었다.14 이처럼 취리히에서는 개교 초기부터 정치경제학이 가르쳐졌으며, 그 수강생은 훗날 철도회사와 은행의 이사회에 참여하게 될 장래의 엔지니어들이었다.

금융 중심지의 역사에서 인문학자들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그들은 취리히를 외국 학생들과 그 가족들에게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었다. 가족들은 아들이 직업 교육과 함께 일반 교양교육을 받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다. 둘째, 그들은 졸업생들의 자기 인식을 형성하였다. 졸업생들은 스스로를 교양 엘리트의 일원으로 여겼고, 이후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지위를 요구하였다. 아래에서 다룰 1869년 설립된 동문회는 폭넓은 일반 교양교육이 엔지니어에게 지도자의 자격을 부여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하였다. 기술 부서에서 은행이나 보험회사의 경영진으로 옮겨 갈 수 있었던 스위스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의 제너럴리스트 문화는 그 뿌리 가운데 하나를 1855년의 일반 학부에 두고 있다.

주석

  1. ETHistory 1855–2005, 시대별 요약 “1855–1904: Zwischen Schule, Fabrik und Labor”, https://www.ethistory.ethz.ch/besichtigungen/epochen/ETH05_epochen.pdf. ↩
  2. J. J. O’Connor and E. F. Robertson, “Zurich Federal Polytechnic history”, MacTutor History of Mathematics, University of St Andrews, https://mathshistory.st-andrews.ac.uk/HistTopics/ETH_history/. ↩
  3. “Culmann, Karl”, Complete Dictionary of Scientific Biography, Encyclopedia.com 경유, https://www.encyclopedia.com/science/dictionaries-thesauruses-pictures-and-press-releases/culmann-karl. 쿨만은 1872년부터 1875년까지 폴리테크니쿰의 교장도 지냈다. ↩
  4. ETH-Bibliothek, “Franz Reuleaux (1829–1905)”, 약전, https://library.ethz.ch/en/collections-and-archives/short-portraits/franz-reuleaux--1829-1905-.html. ↩
  5. Wikipedia, “Gustav Zeuner”,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_Zeuner. 참고용으로 인용한다. 초이너는 1869년의 3차원 인구 도표로도 기억되며, 이 도표는 이후 렉시스 도표(Lexis diagram)로 알려지게 되었다. ↩
  6. Wikipedia, “Rudolf Clausius”, https://en.wikipedia.org/wiki/Rudolf_Clausius. 참고용으로 인용한다. 클라우지우스는 1867년 뷔르츠부르크로, 1869년 본으로 옮겼다. ↩
  7. ETH Zurich, Department of Mathematics, “Die ersten Jahrzehnte / The first decades”, https://math.ethz.ch/the-department/history/first-decades.html. ↩
  8. J. J. O’Connor and E. F. Robertson, “Zurich Federal Polytechnic history”, MacTutor History of Mathematics, University of St Andrews, https://mathshistory.st-andrews.ac.uk/HistTopics/ETH_history/. ↩
  9. University of Zurich, “Francesco De Sanctis (1817–83)”, 취리히 대학 175주년 기념 인물 소개, https://www.175jahre.uzh.ch/fakultaeten/weiter-denken/programm/zentraleveranstaltungen/italia/studiosi/profili/desanctis.html. 데 상크티스는 이후 이탈리아 왕국의 공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
  10. Denise Tonella, “Jacob Burckhardt – der international erfolgreichste Schweizer Historiker”, 스위스 국립박물관 블로그, 2018년 5월 25일, https://blog.nationalmuseum.ch/2018/05/jacob-burckhardt-der-international-erfolgreichste-schweizer-historiker/. ↩
  11. Peter Fleer and Hans Werner Tobler, “Eidgenössische Technische Hochschulen (ETH)”, HLS, 2012년 11월 27일 판, https://hls-dhs-dss.ch/de/articles/010419/. ↩
  12. Wikipedia (German), “Jacob Burckhardt”, https://de.wikipedia.org/wiki/Jacob_Burckhardt (“Von 1855 bis 1858 war Jacob Burckhardt ordentlicher Professor für Kunstgeschichte am Eidgenössischen Polytechnikum in Zürich.”). ↩
  13. ETHistory 1855–2005, 시대별 요약 “1855–1904: Zwischen Schule, Fabrik und Labor”, https://www.ethistory.ethz.ch/besichtigungen/epochen/ETH05_epochen.pdf. ↩
  14. Institut Libéral, “À la redécouverte d’Antoine-Élisée Cherbuliez”, https://www.libinst.ch/fr/actualites/redecouverte-cherbuliez/. ETHistory가 언급한 셰르뷜리에를 이 경제학자로 보는 것은 이 장의 필자에 의한 추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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