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리넨과 양모: 취리히 최초의 수출 산업
마네세 시대의 비단
통과 교역이 상업 도시의 한 토대였다면, 수출을 위한 생산은 또 다른 토대였다. 13세기 후반과 14세기의 취리히를 교역로상의 다른 많은 소도시와 구별 지은 것은, 이 도시가 고가의 수출품인 비단도 생산하였다는 점이다. 스위스 역사사전(HLS)의 취리히시 항목은 13세기부터 기록에 나타나는 비단 산업이 중세 후기 취리히에서 번성하였으며, 모직물과 아마포 직조의 뒷받침을 받으며 광범위한 교역 관계의 중심에 있었다고 기술한다.1 HLS의 교역 개관 항목은 취리히의 비단을 프리부르의 모직물, 장크트갈렌의 아마포와 나란히, 정기시를 통해 수출 시장을 찾은 직물 제품으로 꼽는다.2
정확히 무엇이 생산되었는지는 바라는 만큼 잘 기록되어 있지 않다. 릴리안 모튀-베버가 집필한 HLS의 비단 항목은 16세기의 부흥을 다루기에 앞서, 13세기에 비단 베일과 리본을 직조한 짧은 시기가 있었다고 언급한다.3 2018년 취리히 중앙도서관(Zentralbibliothek Zürich)에서 열린 전시 Seidenglanz: 400 Jahre Seide in Zürich에 관한 보도는, 1300년경 소규모 공방들이 비단 베일이나 머릿수건을 생산하였고 그 대부분이 빈, 프라하, 프랑스로 수출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보도는 또한 도시의 사치 금지 규정에 따라 취리히 안에서는 미혼의 젊은 여성만이 비단을 착용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4 스위스 살아 있는 전통 목록을 위해 작성된 자료는 기록상의 시작을 14세기로 보며, 그 세기 후반부터는 사회적 변화와 전쟁으로 인해 비단 천과 베일 같은 사치품을 더 이상 수출할 수 없게 되었다고 기술한다.5
이처럼 자료들은 제품, 즉 베일과 리본 같은 가벼운 비단 직물에 관해서, 그리고 그 행선지, 즉 동서의 수출 시장에 관해서는 일치한다. 차이가 나는 것은 쇠퇴의 연대이다. HLS의 상인 항목은 취리히 비단 교역의 붕괴를 14세기 말로 본다.6 HLS의 취리히시 항목은 그 붕괴를 1440년대의 구 취리히 전쟁과 연결하며, 그 이후 취리히에는 곡물, 포도주, 소금, 철 등 일용 필수품을 위한 지역 시장만 남았다고 기술한다.7 두 서술은 함께 읽을 수 있다. 사치품 비단의 수출 교역은 흑사병과 14세기 후반의 전쟁들로 이미 약해졌고, 1440년대의 전쟁에서 남은 부분마저 잃었다는 것이다. HLS가 제시하는 15세기 중엽의 인구 수치도 이러한 위축의 모습과 부합한다. 1408년 약 5,700명, 1467년 약 4,750명, 1529년 약 5,100명이었다.
비단 직조에는 생사 또는 견사가 필요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알프스 북쪽에서 이를 생산할 수 없었으므로 수입해야 했으며, 아마도 이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어 들여왔을 것이다.8 비단 직조에는 또한 부유한 소비자 시장과, 원료 구매·직공의 작업·구매자에게 이르는 긴 운송에 자금을 댈 수 있는 상인 집단이 필요하였다. 이렇게 비단 교역은 생사가 들어오는 남쪽 경로와 완제품이 나가는 북쪽 및 동쪽 경로를 연결하였다. HLS가 비단이 광범위한 교역 관계의 중심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같은 항목은 같은 맥락에서 도시에 유대인 대금업자와 롬바르드 금융업자들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름이 롬바르드인을 연상시키는 람파르터투름을 언급한다. 이들의 역할은 제A.IV장에서 다룬다.9
비단의 시대는 취리히 귀족 문화의 절정기와 겹친다. 1300년경 뤼디거 2세 마네세와 그의 아들 요하네스는 오늘날 마네세 필사본(Codex Manesse) 또는 Grosse Heidelberger Liederhandschrift로 알려진 중세 고지 독일어 궁정 서정시의 대규모 수집을 시작하였다. 110명의 시인을 담은 그 핵심 부분은 1300년경에 완성되었고, 보충분은 1330년 또는 1340년 무렵까지 추가되었다. 이 필사본에는 모두 140개 시집에서 나온 약 6,000개의 시연과, 이상화된 궁정 장면 속의 시인들을 그린 137점의 고딕 세밀화가 수록되어 있다.10 마네세 가문은 그 부를 주로 토지 소유에 의존하였다. 가문의 일원인 뤼디거 5세는 1328년 자신의 추모 미사를 위해 은 20마르크를 기부하였는데, 이는 1310년경 레겐스베르크 남작 가문의 연간 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11 이 필사본은 비단 교역과 간접적으로만 연결된 문학적 기념물이다. 그것은 도시 엘리트가 유럽적 수준의 호화 필사본을 주문할 수단과 여유를 지니고 있었고, 사치품의 소비와 생산이 같은 세계의 일부였던 도시를 증언한다. 1304년에 편찬된 취리히 도시법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인 Richtebrief는 비단, 모직물, 아마포 생산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으며, 13세기 후반의 번성하는 직물업과 번영하는 원거리 교역을 증언한다.12
아마포, 모직물, 보덴호
비단이 화려한 교역이었다면, 아마포와 모직물은 꾸준한 교역이었다. HLS의 아마포 항목은 중세 동부 스위스의 아마포 산업을 투어강에서 도나우강과 레히강에 이르는 보덴호 주변의 더 큰 생산 지역 안에 위치시킨다. 이 지역은 콘스탄츠가 지배하였으나, 15세기 중엽 무렵 내부 분쟁으로 콘스탄츠가 약해지자 장크트갈렌이 선도적인 아마포 도시로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다만 아마포 직조는 13세기에 이미 취리히와 바젤에서도 확인된다.13 공식 Schau(검사)를 통한 아마포의 품질 관리는 콘스탄츠에서 처음 발달하였고, 1364년 이전에 장크트갈렌이 이를 채택하였다.14 14세기에는 비베라흐, 메밍겐, 카우프보이렌 주변의 북동쪽 지역이 아마와 면의 혼방 직물인 퍼스티언(Barchent)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 직물은 지중해에서 면화를 들여왔으므로, 오버슈바벤을 베네치아 및 제노바의 교역과 연결하였다.
취리히는 이 거대한 아마포 지대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길드 체제에 편입된 취리히 자체의 아마포·모직물 직조는 지역 시장과 일부 수출을 위한 것이었다. 도시의 역사에 관한 한 현대 개관은 모직물, 아마포, 가공된 비단 제품을 지역적으로 수출한 국내 직물 산업을 묘사하며, 북부 이탈리아와의 연결, 그리고 라인강을 따라 플랑드르와 홀란트에 이르는 연결을 언급한다.15 이 연구에서 취리히의 위치가 지닌 더 중요한 결과는, 이 도시가 보덴호 지역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아마포의 자연스러운 통과 지점이었다는 것이다. 장크트갈렌 아마포, 콘스탄츠의 tela di Costanza, 오버슈바벤의 퍼스티언은 이 지역에서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가는 주요 수출품에 속하였으며, 발렌호 회랑과 그라우뷘덴의 고개들은 그 주요 출구 가운데 하나였다.16
수출 산업의 한계
취리히 수출 산업의 한계를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 중요하다. HLS의 교역 개관은 스위스 상인들이 “상당하지만 국제적으로는 이류의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결론짓는다.17 취리히는 피렌체, 헨트, 심지어 콘스탄츠에 견줄 만한 직물 산업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그 비단 교역은 중세 후기의 위기를 견뎌 내지 못한 사치품 특화 분야였다. 17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훗날 취리히의 거대한 비단 산업은 새로운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1555년 로카르노에서 온 개신교 난민의 도래와 함께 시작되어, 베르트뮐러, 무랄트, 오렐리, 페스탈로치 같은 가문들에 의해 계승되었다.18 중세 비단 시대가 남긴 것은 수출 성공의 기억, 일련의 상업적 연고, 그리고 작은 도시가 먼 시장을 위한 사치품 제조에서 틈새를 찾아낸 선례였다. 이 양상은 다시 나타나게 된다.
주석
- Schultheiss, “Zürich (Gemeinde)”, HLS(앞의 글): “Im Spätmittelalter blühte in Zürich das ab dem 13. Jh. belegte Seidengewerbe, das im Zentrum von ausgedehnten Handelsbeziehungen stand.” ↩
- Jean-François Bergier, “Handel”, in: HLS, https://hls-dhs-dss.ch/de/articles/014032/2011-04-07/. ↩
- Liliane Mottu-Weber, “Soie”, in: DHS/HLS(프랑스어판), https://hls-dhs-dss.ch/fr/articles/013965/: “Après un bref épisode de tissage de voile et de rubans de soie au XIIIe siècle …”. ↩
- Claudia Mäder, “Die Zentralbibliothek zeigt, wie Zürich am seidenen Faden hing”, Neue Zürcher Zeitung, https://www.nzz.ch/feuilleton/eine-stadt-und-ihr-stoff-glaenzend-seide-zuerich-zentralbibliothek-ld.1394206. “seidene Schleier oder Kopftücher”, “grösstenteils exportiert”라고 묘사한다. ↩
- Elisabeth Abgottspon, “Zürcher Seidenindustrie”, Lebendige Traditionen der Schweiz(연방 문화청), 2018년 6월, https://www.lebendige-traditionen.ch/dam/tradition/en/dokumente/tradition/zh/zuercher_seidenindustrie.pdf.download.pdf/zuercher_seidenindustrie.pdf: “Ab der zweiten Hälfte des 14. Jahrhunderts konnten aufgrund sozialer Veränderungen und Kriege die Luxusgüter wie seidene Tücher und Schleier jedoch nicht mehr exportiert werden.” ↩
- Martin Illi, “Kaufleute”, in: HLS, https://hls-dhs-dss.ch/de/articles/016380/2016-03-23/, 중세 부분. ↩
- Schultheiss, “Zürich (Gemeinde)”, HLS(앞의 글). ↩
- Sebastian Brändli, “Wollishofer Seidengeschichte”(2024), Zurich Open Platform, 취리히 대학교, https://zop.zb.uzh.ch/bitstreams/9c64ff7a-b980-4353-8049-201b093ae4fc/download: 비단은 “zuerst in Byzanz und Persien, dann übers Mittelmeer nach Italien” 전해졌고 “gelangte … schliesslich in verschiedenen Formen über die Alpen”. 중세 취리히의 구체적인 공급자는 이 글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
- Schultheiss, “Zürich (Gemeinde)”, HLS(앞의 글). ↩
- Max Schiendorfer, “Manessische Handschrift”, in: HLS, https://hls-dhs-dss.ch/de/articles/011193/. ↩
- “Manesse”, 독일어 위키백과, https://de.wikipedia.org/wiki/Manesse. 참고용으로 인용한다. ↩
- “Richtebrief”, 독일어 위키백과, https://de.wikipedia.org/wiki/Richtebrief. 원본은 Staatsarchiv des Kantons Zürich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용으로 인용한다. ↩
- Marcel Mayer, “Leinwand”, in: HLS, https://hls-dhs-dss.ch/de/articles/013958/2012-05-23/. ↩
- Mayer, “Leinwand”, HLS(앞의 글). “Schau der teils auf dem Land, teils in der Stadt gewobenen Rohleinwand”를 언급한다. ↩
- “Geschichte der Stadt Zürich”, 독일어 위키백과(앞의 글), 13세기와 14세기의 상업 발전 부분. 참고용으로 인용하며, 지리적 범위는 대략적인 것으로 읽어야 한다. ↩
- “Konstanz”, 위키백과(독일어), https://de.wikipedia.org/wiki/Konstanz: “Wichtigstes Handels- und Exportgut war rohe, gebleichte Leinwand, welche weithin bekannt war unter dem Namen Konstanzer Leinwand (tela di Costanza).” ↩
- Bergier, “Handel”, HLS(앞의 글): “einen beachtlichen, international aber einen zweitrangigen Platz”. ↩
- Mottu-Weber, “Soie”, DHS/HLS(프랑스어판, 앞의 글). ↩
일반적인 정보 제공만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글은 법률 또는 세무 자문에 해당하지 않으며, 개별 사안에 대한 자문을 대체하지 않고, 변호사와 의뢰인 간의 위임 관계를 성립시키지 않습니다. 이 글은 2026년 10월 기준의 법적 상황을 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