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임무와 지배구조
Zinskommission(이자위원회)은 2단계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로이가 주재하고 그 밖에 의회 의원 9명으로 구성된 확대위원회는 분기마다 회의를 열어 일반 방침을 정하였다. 하이데거가 이끄는 내부 위원회 또는 집행위원회는 처음 3명으로 출발하여 후에 8명으로 늘었으며, 실제 업무를 수행하였다.1 위원은 모두 소의회 또는 대의회 출신이었고, 적어도 초기에는 무보수로 일하였다. 최초의 유급 서기 한스 C. 후버(Hans C. Huber)는 설립 후 20여 년이 지난 1778년에야 채용되었다. 이 체제는 공화국의 다른 관청의 합의제 행정과 유사하였다. 즉, 서기의 보좌를 받는 의원들의 위원회가 집단적으로 결정하고, 자신들을 임명한 의회에 책임을 지는 구조였다.
자산 보관 규칙에도 같은 합의제 정신이 반영되었다. 자본과 유가증권은 세 개의 열쇠 체계 아래 보관되었다. 열쇠 하나는 서기가, 나머지 둘은 의회가 임명한 열쇠 보관인이 가지고 있어서, 누구도 혼자서는 접근할 수 없었다.2 이 원칙은 구 연방의 국고에서 익숙한 것이다. 시청사 아래 금고실에 보관된 베른의 국가 보물은 여덟 개의 자물쇠가 달린 문으로 보호되었고, 그 열쇠는 정부 구성원 8명에게 나뉘어 있었으며, 보물을 세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3 이런 의미에서 현대 은행감독이 보관 금고 접근과 지급 실행에 요구하는 4인 확인 원칙과 6인 확인 원칙은, 스위스 공화국들이 어떤 감독기관이 존재하기 수세기 전부터 공적 자금에 적용해 온 관행을 성문화한 것이다.
예금자와의 거래는 정해진 주기를 따랐다. 예금은 1년에 두 번, 5월과, 농촌 신용경제의 전통적인 기일인 11월 11일 성 마르티노 축일 이후에 받았다.4 처음 6개월 동안 예금에는 이자가 붙지 않았다. 그 후 위원회는 관청, 길드, 재단에는 3퍼센트, 개인 예금자에게는 3.5퍼센트를 지급하였다. 예금자는 6개월마다 자금을 인출할 수 있었던 반면, 위원회는 자신의 채무 상환에 대해 4년의 통지기간을 유보하였다.5 차등화된 이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핵심 고객인 공공 및 자선 자금은 더 낮은 이율을 받았다. 이는 아마도 그 관리자들이 무엇보다 안전을 중시하였고, 국가가 이 자본의 비용을 낮게 유지하는 데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자금 이동성이 더 높은 개인 예금자에게는 가산 이율이 지급되었다. 위원회에는 관대하고 예금자에게는 엄격한 통지기간의 비대칭은 조악하지만 효과적인 유동성 관리 장치였다. 현대 은행이라면 이를 만기 일치와 유동성 버퍼를 통해 달성할 것이다.
위원회의 위임 사항은 원래 형태에서는 오로지 대외적인 것이었다. 취리히 당국은 Zinskommission이 국내 저당대출 및 상업신용 시장에서 민간 대주와 경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초기 규칙은 투자를 외국 영토로 한정하였다.6 그 목적은 『스위스 역사사전』의 표현을 빌리면 대규모 공적·사적 재산을 위한 해외 자본투자의 관리였다.7 이 제한은 사업의 거시경제적 논리를 드러낸다. 취리히는 국내에 신용이 충분하였고 저축이 과잉 상태였다. 위원회는 그 과잉분을 수출하는 수단이었다. 그 성공은 해외에서 벌어들여 온 수익으로 측정된다.
위원회의 법적 성격은 단순한 호고적 관심 이상의 문제로서, 19세기 이래 논자들을 곤혹스럽게 해 왔다. 2020년 취리히시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한 역사가들은 오래된 문헌에서 따온 표현을 빌려 위원회를 독특한 반(半)국가적 유기체, 즉 국가보증은 없으나 국가의 지휘와 감독 아래 있는 해외 자본투자 은행이라고 묘사한다.8 이 요소들에는 각각 현대적 대응물이 있다. 5만 굴덴의 공적 자본은 일종의 출연자본으로서, 오늘날에도 주(칸톤)가 주립은행에 제공하는 Dotationskapital에 비견된다. 의회가 임명한 의원들에 의한 경영은 공법상 영조물(öffentlich-rechtliche Anstalt)의 지배구조에 해당한다. 반면 보증의 부재는 Zinskommission을 19세기 주립은행들과 뚜렷이 구별한다. 이들 주립은행은 대부분 채무에 대한 완전한 국가보증과 함께 설립되었다.
대륙법과 영미법을 모두 공부한 법률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 체제는 신탁과의 비교도 불러일으킨다. 예금자들은 자금을 한 기관에 맡겼고, 그 기관은 자금을 자기 명의로 보유하며 정해진 위임 범위 안에서 재량에 따라 투자하고, 비용을 공제한 후 수익을 수익자에게 지급하였다. 위탁자이자 감독자인 국가는 1차 손실 자본을 제공하고 관리자를 임명하였다. 현대적 기준에서 이 체제에 결여된 것은 위원회의 자산과 국가 자산의 명확한 분리였다. 바로 이 결여가 1798년, 외국 점령세력이 취리히 국가의 자산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였을 때 위험한 것이 되었다. Zinskommission의 예금자들은 그때 자신들의 보호가, 자신들의 돈이 공화국에 속한 것으로 취급되는지 아니면 자신들에게 속한 것으로 취급되는지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아래 제VIII절에서 다루는 문제이다.
위원회의 지배구조는 이해상충의 문제도 제기한다. Zinskommission을 운영한 의원들은 그 자신이 이 기관의 예금자이자 경우에 따라서는 차입자이기도 한 가문에 속해 있었다. 같은 사람들이 위원회를 감독하는 의회에 앉아 있었고, 위원회가 채권을 보유한 외국 열강에 대한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였다. 이 장을 위해 참고한 문헌에는 위원회가 사적 이익을 위해 남용되었다는 증거가 없다. 기관이 오래 존속하였다는 사실은 그 관리자들이 대체로 신중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구조는 정보와 영향력, 자본을 소수의 집단에 집중시켰고, 현대 지배구조 법이 더 이상 당연시하지 않는 수준의 상호 신뢰를 취리히 도시귀족 내부에 전제하였다. 오늘날 주립은행과 공적 연기금에 적용되는 이사의 독립성, 특수관계인 거래, 감독 기능과 집행 기능의 분리에 관한 규칙은, 1755년의 창립자들이 사회적 통제를 통해 관리하였던 위험에 대한 뒤늦은 응답으로 읽을 수 있다.
주석
- Saller, “50 Prozent Eigenkapital: Die Bank Leu, Teil zwei”, 앞의 글. ↩
- Saller, “50 Prozent Eigenkapital: Die Bank Leu, Teil zwei”, 앞의 글. ↩
- SRF News, “Bern wäre reich – hätte Napoleon den Staatsschatz nicht erbeutet”, https://www.srf.ch/news/napolons-sieg-gegen-bern-1798-bern-waere-reich-haette-napoleon-den-staatsschatz-nicht-erbeutet. ↩
- Saller, “50 Prozent Eigenkapital: Die Bank Leu, Teil zwei”, 앞의 글. ↩
- Saller, “Rathausobligationen: Die Bank Leu, Teil drei”, 앞의 글. ↩
- Toni Saller, “Schwarze Flecken: Die Bank Leu, Teil eins”, Inside Paradeplatz, 2019년 1월 2일, https://insideparadeplatz.ch/2019/01/02/schwarze-flecken-die-bank-leu-teil-i-%EF%BB%BF/. ↩
- 스위스 역사사전(HLS), Baumann, “Bank Leu”, 앞의 글. ↩
- Brengard, Schubert, Zürcher, Die Beteiligung der Stadt Zürich … an Sklaverei und Sklavenhandel, 앞의 글, 19쪽: “eigentümlicher halbstaatlicher Organismus, eine Bank für auswärtige Kapitalanlagen ohne Staatsgarantie, aber unter staatlicher Leitung und Aufsic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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