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개혁파 가족: 칼뱅, 불링거와 취리히 합의(Consensus Tigurinus)
연방을 가로지르는 서신 교환
16세기 취리히와 제네바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두 성직자 사이의 관계였다. 하인리히 불링거는 개혁파 세계의 위대한 서신가였다. 취리히 대학교 스위스 종교개혁사 연구소는 그에게 보내진 편지 약 1만 통과 그가 쓴 편지 약 2,000통이 현존한다고 집계한다. 이 편지들은 1523년의 가장 이른 편지부터 반세기 이상에 걸쳐 있으며, 원본은 주로 취리히 국가기록원과 중앙도서관(Zentralbibliothek)에 소장되어 있다.1 칼뱅은 많은 서신 상대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결코 유일하게 중요한 상대도 아니었다. 불링거는 잉글랜드에서 폴란드에 이르기까지 군주, 주교, 피난민에게 편지를 썼다. 이 서신 교환의 규모 자체가 경제사의 한 사실이다. 그것은 취리히가 개신교 세계 전역에 미치는 정보망의 중심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서신의 영역에서, 이는 훗날 스위스 금융 중심지들이 자본의 영역에서 수행하게 될 기능, 곧 정보와 신뢰, 그리고 결국에는 자금이 통과할 수 있는 중립적인 교환대의 기능을 예고한다.
두 사람은 매우 달랐다. 불링거는 오랜 시민적 전통과 넓은 농촌 영역을 가진 스위스 도시에 뿌리내린 취리히 애국자였던 반면, 칼뱅은 프랑스를 자신의 선교지로 여기기를 결코 멈추지 않은 프랑스 망명자였다. 두 사람은 중요한 점들에서 의견을 달리하였다. 무엇보다도 예정론에서 불링거는 칼뱅의 엄격함과 거리를 두었고, 교회 권징에서 취리히는 교회가 출교를 관장해야 한다는 제네바의 주장을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취리히와 제네바, 그리고 이들과 함께 베른, 바젤 및 그 밖의 스위스 개신교 영역의 교회들이 그 시대의 중심 논쟁, 곧 주의 만찬의 의미를 두고 분열된다면 개혁파의 대의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1549년의 합의
그 논쟁은 츠빙글리와 루터가 합의에 이르지 못한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 이래 취리히와 비텐베르크를 갈라놓고 있었다.2 칼뱅은 중간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빵 안에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현존한다는 루터파 교리를, 그가 츠빙글리파의 견해로 이해한 성례의 단순한 기념으로의 축소와 마찬가지로 단호히 거부하였다. 취리히가 보기에 그의 언어는 위험할 만큼 루터파적으로 들렸다. 초안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불링거는 1548년 11월 칼뱅의 문안에 논평하였고, 이후 칼뱅과 파렐은 1549년 5월 취리히로 가서 불링거와 최종 문안에 합의하였다. 그 결과물인 Consensus Tigurinus, 곧 “취리히 합의”는 성례에 관한 26개 조항으로 이루어졌다. 1551년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출간된 이 문서는 불링거가 독일어로, 칼뱅이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3
이 합의는 취리히, 제네바, 장크트갈렌, 샤프하우젠, 그라우뷘덴, 뇌샤텔, 바젤의 교회들이 받아들였다. 제네바와의 관계가 긴장되어 있었고 교회 지도부가 칼뱅을 불신하던 베른은 유보하였다.4 함부르크의 루터파 목사 요아힘 베스트팔은 이 합의를 공격하여,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에 제2차 성례 논쟁을 열었다. 역설적으로 그 공격은 개혁파가 이제 한목소리로 말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취리히주(칸톤) 개혁교회는 종교개혁 연표에서 그 의의를 간명하게 요약한다. 이 합의가 취리히와 제네바의 개혁교회를 하나로 묶었다는 것이다.5
1566년의 제2 스위스 신앙고백
스위스 개혁파 일치의 두 번째 위대한 문서는 불링거의 것이었다. 그는 1561년 취리히 교회의 교리를 진술하기 위한 개인적 신앙고백을 작성해 두었다. 1565년 말, 제국의회에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서 이탈하였다는 비난을 받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스위스 교회들에 지지를 요청하였다. 취리히 시의회의 결정에 따라 공식적으로 간행된 불링거의 문서는 1566년 3월 12일 프로샤우어 인쇄소에서 라틴어와 독일어로 출간되었다. 취리히, 베른, 샤프하우젠, 장크트갈렌, 쿠어와 3개 동맹(Three Leagues), 뮐루즈와 비엘이 서명하였고, 제네바는 같은 해 프랑스어판으로 이를 승인하였다. 당시 루터파 쪽으로 기울어 있던 바젤은 당분간 거리를 두었다. 이 신앙고백은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1567년 데브레첸에서 헝가리 개혁파에 의해, 1570년 폴란드 개혁파에 의해 채택되었다.6
이 책의 목적상, 두 문서는 기억해 둘 만한 분업을 보여 준다. 교리적으로 취리히와 제네바는 하나의 개혁파 가족의 일부가 되었다. 훗날 통용된 “칼뱅주의”라는 이름은 그 가족의 교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취리히의 불링거에 의해 정식화되었는지를 가린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두 도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취리히 합의는 교회 질서에 관해 침묵하였고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은 교회와 위정자 사이의 서로 다른 배치에 여지를 남겼으므로, 두 도시는 성례에 관해서는 합의하면서도 권징과 위정자의 위치에 관해서는 계속 의견을 달리할 수 있었다. 이하의 절들에서 보듯이, 두 도시는 피난민과 복지의 관리에 관해서도 의견을 달리하였다. 공유된 교리가 두 도시 사이에 신뢰를 만들고 유럽에서 공통의 개혁파 정체성을 형성한 반면, 두 도시의 경제를 형성한 것은 서로 다른 제도였다.
주석
- Institut für Schweizerische Reformationsgeschichte, Universität Zürich, “Bullinger Digital”, https://www.irg.uzh.ch/de/forschung/bullinger/bullinger-digital.html. 이 프로젝트는 서신 가운데 아직 편집되지 않은 부분을 목록화하여 온라인으로 공개하고 있다. ↩
- Zentralbibliothek Zürich, “Reformation”(앞의 문헌),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과 그로 인한 종파적 균열에 관하여. ↩
- 26개 조항이라는 수는 The Book of Concord, “Consensus Tigurinus (1549)”, https://thebookofconcord.org/sources-and-context/consensus-tigurinus/에 수록된 서문으로 확인된다. ↩
- Wikipedia, “Consensus Tigurinus”(앞의 문헌). 이 자료는 합의를 받아들인 교회들을 열거하고 베른의 지속적인 반대를 언급한다. ↩
- Evangelisch-reformierte Landeskirche des Kantons Zürich, “Reformation von A bis Z”(앞의 문헌), 1549년 항목. ↩
- “Das Zweite Helvetische Bekenntnis”, Theologische Beilage zur STH-Perspektive (Staatsunabhängige Theologische Hochschule Basel), 2013년 4월, https://sthbasel.ch/wp-content/uploads/Theologische-Beilage-Zweites-Helvetisches-Bekenntnis.p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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