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카르노: 공동 영지와 그 개신교 공동체
12개 주가 공동 통치한 영지
로카르노(Locarno)는 정복에 의해 스위스 영토가 되었다. 밀라노 공작으로부터 이 도시와 그 영역을 봉토로 받아 보유하던 루스카(Rusca) 가문은 1503년 동맹군이 로카르노 지역을 점령하면서 지배권을 잃었다. 1513년 노바라 전투 이후 스위스인들은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로부터 성을 넘겨받았다. 마리냐노에서의 패배 후 체결된 1516년 프리부르 평화조약은 로카르노 지역 전체를 공식적으로 동맹에 귀속시켰다.1 이 영역은 어느 한 주(칸톤)에도 편입되지 않았다. 이 영역은 “ennetbirgische Vogteien”, 즉 산 너머의 네 대관령(루가노, 멘드리시오, 로카르노, 발레마자)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이 대관령들은 정복 당시 동맹의 구성원이던 12개 주가 공동으로 통치하였다. 주권을 가진 주들이 윤번제로 2년 임기로 선임한 대관(Landvogt, balivo)이 이들 주의 이름으로 민사 및 형사 재판권을 행사하였고, 매년 바덴 동맹회의에서 파견된 대표들로 구성된 감사단에 회계를 보고하였다.2
이러한 헌정 구조가 로카르노 개신교도들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공동 통치령에서는 어느 한 주도 종교 문제를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으므로, 종교 문제는 주권을 가진 주들의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취리히가 패배하고 츠빙글리가 전사한 1531년 제2차 카펠 전쟁 이후, 제2차 카펠 평화조약은 각 주가 자기 영역 안에서 종교를 자유롭게 규율하도록 하면서도, 공동 통치령의 개혁파 공동체가 옛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고 그곳의 가톨릭 소수파를 보호하였다. 이탈리아어권 통치령을 다스리는 12개 주권 주 가운데 가톨릭 지역(Orte)이 다수를 차지하였고, 이로써 바덴 동맹회의가 로카르노의 종교적 장래를 결정하는 무대가 되었다.3
로카르노 자체도 상당한 비중을 지닌 도시였다. 로카르노는 롬바르디아와 스위스 및 독일 도시들을 잇는 주요 교역로 위에 있었으며, 남쪽에서 곡물과 소금을 수입하고 마조레호를 거쳐 북쪽으로 상당한 양의 목재와 가축을 수출하였다.4 이 도시의 사회는 오랜 귀족층인 카피타네이(capitanei)가 지배하였다. 카피타네이는 중세 성기 이래 도시와 그 요새 및 주변 토지에 대한 권리를 보유해 온 가문들의 집단이었다. 12세기부터 로카르노에서 기록이 확인되며 아마도 롬바르디아 귀족 다 베소초(da Besozzo) 가문의 후손으로 보이는 오렐리(Orelli) 가문은 1365년에 이르러 로카르노 피에베(pieve) 평의회의 21개 의석 중 15석을 장악하였다. 이 가문은 1342년부터 1798년까지 브리사고의 포데스타(podestà) 직을 보유하였고, 블레니오 계곡에서 세습 행정 직무를 수행하였다.5 무랄토(Muralto) 가문은 무랄토에 있던 성에서 그 이름을 얻었는데, 이 성은 1191년 또는 1192년 코모 주교가 봉토로 수여하였고 1380년경 파괴되었다. 이 가문 역시 카피타네이에 속하였으며, 이 지역 성들의 지분과 광대한 토지를 보유하였다.6 이 도시의 또 다른 귀족 가문인 아피아니(Appiani) 가문은 루도비코 보로메오(Ludovico Borromeo)의 사위로서 밀라노의 왕실 재무관을 지낸 조반니 바티스타 아피아니(Giovanni Battista Appiani, 1540년 사망)와, 16세기 초 로카르노의 징세관을 배출하였다.7
이들 가문은 롬바르디아 상업 사회의 넓은 시야를 지니고 있었다. 밀라노, 코모, 베르가모, 베네치아가 그들의 자연스러운 시장이었으며, 그들 중 여럿은 토지 수입을 교역, 의술 또는 법률과 결합하였다. 훗날 오렐리 가문의 취리히 계열을 세우게 되는 알로이시오 오렐리(Aloisio Orelli)는 1541년 로카르노에서 약국을 매입하고 교역에 종사하였다. 그와 함께 망명한 이들 가운데 조반니 무랄토(Giovanni Muralto)는 내과의사이자 외과의사였고, 마르티노 무랄토(Martino Muralto)는 법률가였으며, 타데오 두노(Taddeo Duno)는 바젤과 파비아에서 의학과 교양학문을 공부하였다.8 사회적 지위, 문해력, 상업적 인맥, 그리고 어느 정도의 동산이 결합된 이러한 조건은, 그들이 알프스 북쪽에서 새로 시작해야 했을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조반니 베카리아와 개혁파 회중의 형성
종교개혁은 한 학교 교사를 통해 로카르노에 전해졌다. 1508년 또는 1511년에 태어난 조반니 베카리아(Giovanni Beccaria)는 로마에서 사제 수업을 일부 받은 뒤 1535년 로카르노로 돌아왔고, 1536년 산프란체스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의 라틴어 학교 책임자로 임명되었다.9 1539년경 그는 성서와 종교개혁가들의 저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취리히의 신학자 콘라트 펠리칸(Konrad Pellikan) 및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와 교류하였고, 그의 영향 아래 로카르노 주민들의 한 무리가 성서 공부를 위해 모이고 미사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 공동체는 약 200명의 구성원으로 성장하였으며, 처음에는 종교재판소를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활동하였다.10
이 회중은 로카르노 엘리트층의 여러 갈래에서 구성원을 끌어모았다. 무랄토 가문의 구성원들은 1535년 이후 종교개혁을 받아들였고, 다른 지역 가문들 및 밀라노와 피에몬테에서 온 망명자들과 합류하였다. 베카리아 이후 회중의 지도권은 타데오 두노와 마르티노 무랄토에게 넘어갔다.11 두노는 1523년 로카르노의 오래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이 가문은 원래 아스코나 출신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베카리아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 1545년부터 1547년까지 바젤에서, 1547년과 1548년에는 파비아에서 공부하여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12 가문의 전승에서 알로이시오 오렐리는 이 도시 개신교 공동체의 창립자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종교적 분열은 가문 내부까지 관통하였다. 개신교도 무랄토 가문 사람들이 망명길에 오른 반면, 갈레아초 무랄토(Galeazzo Muralto)는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며 1528년부터 1557년까지 로카르노의 수석사제로 봉직하였다.13
이처럼 초기 로카르노 종교개혁은 명사와 교육받은 시민들의 운동이었으며, 여성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고 처음부터 취리히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링거의 서신이 이 연결을 증언한다. 타데오 두노가 그에게 보낸 첫 편지는 그해 여름의 결정적인 논쟁이 있은 지 불과 며칠 뒤인 1549년 8월 9일 자로 되어 있다.14 신학적 지도를 취리히에 구한 이 공동체의 지향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1555년 취리히가 망명자들에 대해 특별한 책임감을 느낀 이유와, 망명자들 스스로 취리히를 목적지로 선택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1549년의 논쟁과 1554년 동맹회의의 결정
1540년대에 가톨릭 성직자들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547년 베카리아는 자신의 학교에서 매일 드리던 미사를 폐지하였다. 1549년 8월 5일 대관의 성에서 공식 논쟁이 열렸고, 베카리아는 이 자리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성서와 일치하는 한도에서만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체포되었다가 여론의 압력으로 석방되었고, 1550년 로카르노를 떠나 회색동맹 영역에 있는 메솔치나 계곡, 즉 미소크스(Misox)로 갔다.15 타데오 두노는 베카리아 편에서 논쟁에 참여하였고, 훗날 1602년에 간행된 De persequutione adversus Locarnenses에 그 경과를 기록하였다.16
이후 몇 년 동안 압박은 점차 강화되었다. 1550년 바덴 동맹회의는 12개 주의 공동 통치령에서 개혁파 공동체를 금지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하였고, 이에 로카르노 공동체는 사적으로는 개혁파 신앙을 계속 실천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가톨릭임을 선언하였다.17 코모 인근 아소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두노는 1551년 종교재판소에 고발되었고, 1553년 로카르노로 돌아왔다. 이 문제는 1554년 7월과 11월 바덴에서 열린 두 차례의 동맹회의에서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동맹회의는 로카르노의 개신교도들에게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오든지 영역을 떠나든지 하라는 최후통첩을 부과하였다.18 유럽 개신교회 공동체(Community of Protestant Churches in Europe)의 서술에 따르면 120명이 자신의 신앙고백에 충실하겠다고 선언하였다.19
취리히에게 이 결정은 정치적 패배였다. 베카리아의 중재를 통해 개혁파 도시인 베른, 샤프하우젠, 취리히는 로카르노 주민들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동맹회의의 판정을 막지는 못하였다. 취리히는 결과를 받아들이고 망명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20 이 결정은 스위스 밖에서도 파장을 낳았다. 추방은 당대 유럽 여론에 널리 반향을 일으켰으며, 제국의 종교 평화를 낳은 회의인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도 논의된 것으로 전해진다.21
로카르노의 여성들과 1555년 3월의 출발
1554년 3월 로카르노의 모든 주민은 가톨릭 의식에 따라 고해하고 영성체를 받도록 요구받았으며, 개혁파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사람들은 신앙을 철회하거나 망명을 감수해야 했다. 1555년 1월 테라치나 주교인 교황대사 오타비아노 리베르타(Ottaviano Riverta, della Rovere)는 주민들을 다시 개종시키기 위해 도미니코회 설교자들을 초빙하였다. 화체설에 관한 도미니코회 설교가 있은 뒤, 이 도시에서 개신교 교사로 알려진 루치아 벨로(Lucia Bellò)는 교황대사에게 성서에 근거한 토론을 요청하였고, 바르바라 무랄토(Barbara Muralto), 카테리나 아피아니(Caterina Appiani), 카테리나 로살리니와 엘리사베타 로살리니(Caterina and Elisabetta Rosalini), 키아라 토마(Chiara Toma)와 함께 그 앞에 나섰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신념을 재확인하였다. 바르바라 무랄토, 루치아 벨로, 카테리나 아피아니는 각각 50크라운의 벌금을 부과받았고 재산 몰수의 위협을 받았다. 망명 공동체와 불링거가 개입한 거의 2년에 걸친 협상 끝에 신성모독 혐의는 철회되었고 벌금은 감액되었다.22
이 일화는 취리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이 공동체의 두 가지 특징을 보여 준다. 첫째, 여성들은 공동체에서 가장 단호한 구성원들에 속하였으며, 그들 중 여럿은 과부나 가장으로서 훗날 취리히의 기록에 독립적인 경제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둘째, 이 공동체는 이미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불링거에게 보낸 편지, 동맹회의에서의 취리히의 개입, 그리고 벌금을 둘러싼 긴 협상은, 망명한 상인들이 훗날 자신들의 교역을 위해 펼치게 될 알프스를 넘나드는 이익 대변 활동의 첫 연습이었다.
1555년 3월 3일 로카르노의 개혁파 신도들은 고향 도시를 떠났다. 「스위스 역사사전」(HLS)은 취리히로 떠난 로카르노 주민이 100명을 넘었다고 기술한다. 같은 사전의 타데오 두노 전기는 그가 약 100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메솔치나를 거쳐 산베르나르디노 고개를 넘어 떠났다고 서술하는 반면, 최근의 한 교회 측 서술은 로카르노 출신 피난민의 총수를 약 200명으로 본다.23 수치의 차이는 망명자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이동하지 않았고, 일부는 바젤, 베른 또는 그라우뷘덴으로 계속 이동하였으며, 다른 이들은 이후 몇 달에 걸쳐 뒤따랐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로카르노에게 이 출발은 지속적인 손실이었다. 이로써 이 도시에서 개혁파의 존재는 수세기 동안 끊어졌으며, 이 지역에 개혁파 공동체가 다시 나타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2017년 2월 로카르노는 유럽 개신교회 공동체의 “유럽 종교개혁 도시” 네트워크에 가입하였으며, 현재 카스텔로 비스콘테오(Castello Visconteo)에는 로카르노 지역 개신교 역사에 관한 상설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24
주석
- HLS, 이탈리아어판, Janke and Huber, “Locarno (comune)”(앞에서 인용). 이탈리아 원정과 마리냐노에 관해서는 이 책의 A부 참조. ↩
- HLS, 이탈리아어판, André Holenstein, “Baliaggi comuni”, https://hls-dhs-dss.ch/it/articles/009817/. Holenstein은 공동 통치령을 13개 주, 동맹 영역, 보호령과 나란히 구 스위스 동맹의 네 번째 정치적·영토적 구성 요소로 기술한다. ↩
- Wikipedia(독일어판), “Reformation und Gegenreformation in der Schweiz”, https://de.wikipedia.org/wiki/Reformation_und_Gegenreformation_in_der_Schweiz. 제2차 카펠 평화조약과 그것이 취리히에 미친 경제적 결과에 관해서는 B.I장 참조. ↩
- HLS, 이탈리아어판, Janke and Huber, “Locarno (comune)”(앞에서 인용). ↩
- HLS, 이탈리아어판, Rodolfo Huber and Martin Illi, “Orelli”, 2017년 5월 3일 판, https://hls-dhs-dss.ch/it/articles/020179/2017-05-03/. ↩
- Wikipedia(영어판), “Muralto family”, https://en.wikipedia.org/wiki/Muralto_family. 이 항목은 HLS의 가문 항목을 요약한 것이다. ↩
- HLS, 이탈리아어판, “Appiani”, 2001년 8월 2일 판, https://hls-dhs-dss.ch/it/articles/023486/2001-08-02/. ↩
- Wikipedia(영어판), “Aloisio Orelli”, https://en.wikipedia.org/wiki/Aloisio_Orelli, H. Schulthess, Die von Orelli von Locarno und Zürich(1941) 인용; “Martino Muralto”, https://en.wikipedia.org/wiki/Martino_Muralto. ↩
- Wikipedia(독일어판), “Giovanni Beccaria (Reformator)”, https://de.wikipedia.org/wiki/Giovanni_Beccaria_(Reformator). ↩
- 유럽 개신교회 공동체, “Reformation Cities of Europe: Locarno”, https://reformation-cities.org/cities/locarno/. 로마 종교재판소는 1542년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재편되었다. ↩
- Wikipedia(영어판), “Barbara Muralto”, https://en.wikipedia.org/wiki/Barbara_Muralto, Ferdinand Meyer, Die evangelische Gemeinde in Locarno, ihre Auswanderung nach Zürich und ihre weitern Schicksale(1836) 및 Eidgenössische Abschiede 인용. ↩
- HLS, 이탈리아어판, Pablo Crivelli, “Duno, Taddeo”, https://hls-dhs-dss.ch/it/articles/010112/. ↩
- Wikipedia(영어판), “Aloisio Orelli” 및 “Muralto family”(모두 앞에서 인용). ↩
- 스위스 국립박물관, 블로그, “The Protestants of Locarno”, 2024년 2월, https://blog.nationalmuseum.ch/en/2024/02/the-protestants-of-locarno/. ↩
- Wikipedia(독일어판), “Giovanni Beccaria (Reformator)”(앞에서 인용). ↩
- HLS, 이탈리아어판, Crivelli, “Duno, Taddeo”(앞에서 인용). ↩
- HLS, 이탈리아어판, Janke and Huber, “Locarno (comune)”(앞에서 인용); Wikipedia(영어판), “Barbara Muralto”(앞에서 인용). ↩
- HLS, 이탈리아어판, Crivelli, “Duno, Taddeo”(앞에서 인용). ↩
- 유럽 개신교회 공동체, “Reformation Cities of Europe: Locarno”(앞에서 인용). ↩
- 유럽 개신교회 공동체, “Reformation Cities of Europe: Locarno”, https://reformation-cities.org/cities/locarno/: “Auf Vermittlung Beccarias versprachen die reformierten Städte Bern, Schaffhausen und Zürich, den Locarnesern beizustehen” 및 “Am 3. März 1555 brach die Hälfte der Bevölkerung Locarnos auf ins Exil, das ihnen in Zürich gewährt wurde.” HLS, 이탈리아어판, “Locarno (comune)”, https://hls-dhs-dss.ch/it/articles/002108/2022-12-20/: “Nel 1554 la Dieta di Baden impose perciò agli evangelici l’abiura o l’esilio.” 협상의 상세한 경과는 Eidgenössische Abschiede에 기록되어 있다. ↩
- 유럽 개신교회 공동체, “Reformation Cities of Europe: Locarno”(앞에서 인용). 스위스 국립박물관 블로그(앞에서 인용) 역시 추방이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동맹 구성원들 사이에 종파 간 불신을 크게 높였다고 지적한다. ↩
- Wikipedia(영어판), “Barbara Muralto”(앞에서 인용). 교황대사 이름의 표기는 사료에 따라 Riverta, Raverta, della Rovere로 다양하다. ↩
- HLS, 이탈리아어판, Janke and Huber, “Locarno (comune)”(앞에서 인용); HLS, 이탈리아어판, Crivelli, “Duno, Taddeo”(앞에서 인용); Nathalie Dürmüller, “Migranten von einst: reformierte Tessiner im Zürcher Exil”, ref.ch, 2016년 10월 5일, https://www.ref.ch/news/migranten-von-einst-wie-reformierte-tessiner-im-exil-fuss-fassten/. ↩
- Città di Locarno, “Locarno Città europea della Riforma”, https://www.locarno.ch/it/locarno-citta-europea-della-riforma. ↩
일반적인 정보 제공만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글은 법률 또는 세무 자문에 해당하지 않으며, 개별 사안에 대한 자문을 대체하지 않고, 변호사와 의뢰인 간의 위임 관계를 성립시키지 않습니다. 이 글은 2026년 10월 기준의 법적 상황을 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