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중심지에 남긴 유산
1525년의 그로스뮌스터에서 파라데플라츠(Paradeplatz)를 찾는 것은 시대착오일 것이다. 취리히 종교개혁은 종교 운동이었으며, 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업적이 사적 자산의 관리와 연결되는 것을 보았다면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금융 중심지는 또한 그곳에 예치하고 대출하고 투자하는 사람들에게 그 장소를 신뢰할 만하게 만드는 제도, 관행, 평판으로 이루어진다. 츠빙글리의 체제가 지닌 다섯 가지 요소가 취리히에서 그러한 환경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첫째는 시민적 통제 아래 있는 교회라는 모델이다. 취리히 종교개혁은 시의회가 종교를 포함하여 도시 영역 내의 모든 사안에서 주권적 권위임을 확인하였다. 시의회는 이 권위를 공개적 절차, 논쟁, 조례, 법원을 통해 행사하였다. 시민적 권위는 질서, 도덕, 재산의 보증인이 되었다. 후대에 이 전통은 사적 행위와 사업을 감독한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간섭적이고, 재산을 보호하고 계약을 집행한다는 점에서 다른 면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국가를 낳았다. 사유재산에 대한 강력한 법적 보호와 금융 활동에 대한 긴밀한 공적 감독을 결합한 오늘날 스위스의 방식은 여러 원천을 가지고 있으며, 시민적 권위와 도덕적 권위를 융합한 츠빙글리의 방식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둘째는 시민적 규율이다. 혼인법원, 풍기 명령, 대회(synod)는 개인의 행위가, 그 경제적 행위까지 포함하여, 공적 관심사가 되는 문화를 만들어 냈다. 거래에서의 정직, 의무의 이행, 과시의 자제는 공공 기관에 의해 강제되었고, 여러 세대의 시민들에 의해 내면화되었다. 훗날 취리히의 상인과 은행가들이 해외에서 누린 절제와 신뢰성의 평판은 이 규율에 도덕적 기반을 두고 있었다. 비록 그 상업적 가치는 규율 자체가 이미 누그러진 지 오래된 뒤에야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셋째는 교육이다. 프로페차이(Prophezei)와 교회 재산으로 재원을 조달한 학교들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주민층, 그리고 그 상층에서는 학식 있는 주민층을 만들어 냈다. 카롤리눔(Carolinum)은 목회자뿐 아니라 상인 및 관료 가문의 아들들도 교육하였다. 기본재산과 공교육 사이의 연결은 그로스뮌스터 참사회의 자산이 대학교 설립에 기여한 19세기까지 이어졌고, 취리히의 대학들과 공과대학이 금융 중심지에 전문 인력을 공급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넷째는 인쇄이다. 프로샤우어(Froschauer) 인쇄소는 취리히를 인쇄된 지식의 생산지이자 수출지로 만들었고, 도시에 출판, 인쇄, 나아가 훗날 보안 인쇄라는 지속적인 산업을 안겨 주었다. 프로샤우어에서 오렐 퓌슬리(Orell Füssli)로 이어지는 계보는 1531년의 성경을 오늘날의 유가 증서 인쇄와 연결한다.
다섯째는 정치적 영향력을 사는 외국 자금에 대한 경계이다. 1521년 프랑스 동맹에 대한 취리히의 거부, 연금의 금지, 그리고 연금을 받은 시의원의 처형은 공직자에 대한 외국의 금전 지급을 불신하는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전통이 지속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취리히는 1614년 프랑스 동맹에 가입하였고, 그 엘리트층은 훗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외국 용병 복무와 해외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이 전통은 도시에 공적 청렴성의 어휘를 남겨 주었다. 그 어휘 속에서 공직자의 외국 자금 수수는 부패의 한 형태였으며, 이는 뇌물, 이해충돌, 외국 국가가 국내 정치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오늘날의 관심을 예고한다. 오늘날 외국 공무원에 대한 뇌물 공여, 제재 또는 정치적 주요 인물에 관한 스위스의 규정에 대해 자문하는 변호사는 츠빙글리도 알아보았을 도덕적 지평 안에서 일하고 있다.
제B.IV장에서 전개하는 제네바와의 비교는 이미 한 가지 점에서 시사적이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은 자본, 상업적 연결망, 세계시민적 시각을 가져온 대규모 난민 공동체의 도래와 결부되었고, 위정자로부터 일정한 독립성을 주장한 교회와도 결부되었다.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은 자신의 시의회를 통해 활동한 토착 엘리트층의 작품이었다. 이곳에서 교회는 국가에 종속된 채로 남았고, 외국 난민에 대한 개방은 더 늦게, 더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이렇게 두 도시는 시민적 통제와 국제적 노출의 서로 다른 조합을 가지고 근대 초기에 들어섰으며, 그 차이는 오늘날에도 두 도시 금융 중심지의 성격에서 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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