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펠: 전쟁, 패배와 도시 종교개혁의 한계
동맹과 제1차 카펠 전쟁
1525년부터 1531년 사이에 츠빙글리의 영향력은 대외정책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연방 내에서 고립되고 동맹회의(Diet)에서 배제될 위협에 처한 취리히는 다른 개혁파 도시들 가운데에서 동맹을 구하였다. 1527년부터 1530년 사이에 취리히는 콘스탄츠, 베른, 장크트갈렌 및 그 밖의 도시들과 일련의 Burgrechte, 곧 “기독교 시민동맹”을 체결하였는데, 「스위스 역사사전」(HLS)은 이를 취리히가 고립에서 벗어난 수단으로 서술한다.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은 1528년과 1529년에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중부 스위스의 다섯 가톨릭 주(칸톤), 곧 루체른,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는 자신들의 “기독교 연합”을 결성하고,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가 동생인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왕과 동맹을 맺었다. 분쟁의 초점은 여러 주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공동 영지였다. 그곳에서는 어느 종교가 우위에 서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명확한 법적 해답이 없었다. 또 다른 초점은 취리히가 자신의 보호 영역 안에 있다고 여긴 장크트갈렌 수도원이었다.1
1529년 6월 취리히는 전쟁에 나섰다. 취리히 군대는 추크와의 경계에 있는 카펠까지 진격하여 가톨릭 군대와 대치하였으나,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중립 주들의 중재인들이 강화를 성사시켰다. 이 사건에서 스위스 정치문화에서 가장 사랑받는 전설인 Kappeler Milchsuppe(카펠 우유 수프)가 생겨났다. 양 진영의 병사들이 경계 위에 놓인 우유와 빵이 든 큰 솥에서 함께 먹었으며, 각 진영은 자기 영토 쪽에서 떠먹었다고 전해진다.2 1529년 6월 26일의 제1차 카펠 평화조약은 개혁파 측에 유리하였다. 공동 영지의 공동체들은 다수결로 종교개혁을 채택할 수 있게 되었다. 다섯 주와 페르디난트 사이의 동맹은 무효가 되었고, 중재인들은 새벽 2시 진영에서 동맹 문서를 찢어 버렸다. 다섯 주는 또한 전쟁 비용을 지급해야 했으며, 그 금액은 나중에 중재인들에 의해 2,500크로네로 정해졌다. 가톨릭 주들은 지급을 거부하다가 1529년 9월 12일 취리히가 곡물 금수 조치를 취하자, 1530년 가을에 분할하여 지급하였다.3
곡물 금수 조치의 사용은 강조할 만하다. 중부 스위스의 주들은 취리히 시장과 그 너머의 슈바벤 지방에서 오는 곡물에 의존하였으며, 이 곡물은 취리히 영역을 거쳐 그들에게 도달하였다. 이 공급에 대한 통제는 경제적 무기였고, 취리히는 이를 평화조약상의 금전적 의무를 강제하는 데 사용하였다. 이는 오늘날 경제 제재라고 부를 만한 것의 초기 사례이다.
봉쇄와 제2차 카펠 전쟁
1529년의 평화조약은 근본적인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취리히와 츠빙글리는 이 조약을 공동 영지에서 종교개혁을 촉진할 수 있는 허가로 해석하였고, 가톨릭 주들에게도 자신들의 영토에서 복음주의 설교를 허용하도록 압박하였다. 1531년 5월 취리히와 베른은 다섯 주가 그러한 설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하기 위해 이들에 대해 곡물과 소금의 봉쇄를 단행하였다. 봉쇄는 산악 주들의 주민에게 타격을 주었으나 의도한 정치적 결과를 낳지 못하였다. 오히려 봉쇄는 그들을 전쟁으로 몰아갔다. 1531년 10월 11일 약 7,000명에 이르는 다섯 주의 군대가 카펠에서 공격하였다. 취리히는 동원이 늦었고, 전장에 있던 병력은 약 2,000명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궤멸되었다. 약 500명이 전사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군목으로 군대를 따라갔던 츠빙글리도 있었으며, 승리자들은 그의 시신을 이단자의 시신으로 취급하여 불태웠다. 이어 멘칭겐 인근의 구벨(Gubel)에서 두 번째 패배가 뒤따랐다. 그곳에서 개혁파 부대는 10월 24일 야간 기습을 받아 약 600명을 잃었다.4 카펠의 전사자 가운데에는 프라우뮌스터의 마지막 여자수도원장의 남편인 에버하르트 폰 라이샤흐(Eberhard von Reischach)도 있었다.
카펠에 이르게 한 전략은 16세기 이래 비판을 받아 왔다. 곡물 공급을 종교정책의 지렛대로 사용한 것은 경제적 의존을 전쟁의 원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또한 취리히 권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 도시는 시장과 자금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연한 상대에 맞서 종교전쟁을 치를 만한 군사적 결속력과 자신의 농촌 지역에서의 정치적 지지가 부족하였다. 농촌의 많은 신민들은 도시와 그 설교자들의 야심에 봉사하는 것으로 보이는 전쟁에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제2차 카펠 평화조약과 그 한계
제2차 카펠 평화조약은 취리히와 1531년 11월 16일에 체결되어 11월 20일에 날인되었고, 베른과는 11월 24일 브렘가르텐에서 별도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1529년의 성과를 뒤집었다. 각 주는 자기 영토 안에서 그 신앙을 방해받지 않도록 되었고, 다섯 주에서 복음주의 설교를 허용하라는 취리히의 요구는 거부되었다. 공동 영지에서는 개혁파 공동체가 옛 신앙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가톨릭 소수파는 예배하고 교구를 형성할 권리를 얻었다. 반면 다수결로 종교개혁을 도입할 권리는 사라졌다. 취리히는 새로운 동맹을 해체하고, 제1차 평화조약의 자신의 사본을 넘겨주며, 1530년에 받은 전쟁 비용을 반환하고, 전쟁 중 손상된 교회에 대해 추크에 배상해야 했다.5 장크트갈렌 수도원은 복원되었고, 이로써 취리히의 동쪽 방향 확장은 끝났다. 헬무트 마이어(Helmut Meyer)는 이 평화조약이 수 세기 동안 스위스의 종파 지도를 형성하였으며, 그로 인한 분열이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공동의 대외정책과 연방의 내부 발전을 저해하였다고 결론짓는다.6
취리히 내부에서 패배는 정치적 결산을 불러왔다. 농촌 공동체들이 도시에 요구를 제시하자, 시의회는 도시와 농촌 사이의 조약을 통해 이를 수용하였다. Kappelerbrief(카펠 서한)로 알려진 이 조약은 스위스 법원(法源) 총서에 수록되어 있다.7 그 실질적 내용으로서 시의회는 전쟁이나 동맹을 시작하기 전에 농촌과 협의할 것을 약속하였고,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국한하고 세속의 일에 간섭하지 않도록 할 것을 약속하였다. 츠빙글리가 내부 평의회의 조언자이자 동맹의 설계자로서 수행했던 정치적 역할은 되풀이되지 않게 되었다. 1531년 12월 9일 시의회는 카펠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고향 브렘가르텐에서 취리히로 피신해 온 27세의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를 츠빙글리의 후임으로 초빙하였다. 불링거는 당국을 훈계할 설교단의 자유를 고수하였으나, 교회가 정책을 지휘하지 않는다는 점은 받아들였다. HLS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제한적이었으며, 1531년 이후 취리히가 연방 정치에서 방어적 입장을 취하였다고 지적한다.8 그는 44년 동안 취리히 교회를 이끌었다. 그가 시의회와 협상하여 이룬 합의, 곧 자유롭게 설교하되 통치는 시의회에 맡기는 교회라는 합의는 앙시앵 레짐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주석
- HLS, “Zurich (canton)”, “La Réforme et l’Eglise d’Etat” (Meinrad Suter), https://hls-dhs-dss.ch/fr/articles/007381/2017-08-24/, 1527–1530년의 “combourgeoisies chrétiennes”에 관하여. HLS, “Kappelerkriege” (Helmut Meyer), https://hls-dhs-dss.ch/textes/d/D8903.php. ↩
- HLS, “Kappelerkriege” (Helmut Meyer), 앞의 글; “Kappel Abbey”,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Kappel_Abbey, 솥의 위치를 취리히와 추크 사이의 주 경계로 본다. ↩
- Zecherle, “Erster Kappeler Landfrieden (26. Juni 1529)”의 서론, Europäische Religionsfrieden Digital, http://diglib.hab.de/content.php?dir=edoc%2Fed000227&distype=optional&metsID=edoc_ed000227_erster_kappeler_landfriede_einleitung&xml=einleitungen%2Ferster_kappeler_landfriede_einleitung.xml&xsl=einleitungen%2Feinleitung.xsl. ↩
- “Second War of Kappel”,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Second_War_of_Kappel. 1531년 5월의 봉쇄, 병력 수, 손실, 츠빙글리 시신의 “als Ketzer” 소각 및 구벨 전투에 관하여는 HLS, “Kappelerkriege” (Helmut Meyer), 앞의 글. ↩
- Andreas Zecherle, “Zweiter Kappeler Landfrieden (20./24. November 1531)”의 서론, Europäische Religionsfrieden Digital, https://diglib.hab.de/content.php?dir=edoc%2Fed000227&distype=optional&metsID=edoc_ed000227_zweiter_kappeler_landfriede_einleitung&xml=einleitungen%2Fzweiter_kappeler_landfriede_einleitung.xml&xsl=einleitungen%2Feinleitung.xsl. ↩
- HLS, “Kappelerkriege” (Helmut Meyer), 앞의 글. ↩
- 이 조약은 Sammlung Schweizerischer Rechtsquellen, ZH NF I/1/3, 제151호에 “Vertrag zwischen Stadt und Landschaft Zürich (Kappelerbrief)”로 수록되어 있다, https://rechtsquellen.sources-online.org/ZH_NF_I_1_3/SSRQ_ZH_NF_I_1_3_151. ↩
- 1531년 10월 21일 그의 취리히 피신에 관하여는 “Second War of Kappel”, 위키백과, 앞의 글. 1531년 12월 9일의 초빙, 1523년부터 1529년까지 불링거의 카펠에서의 교직 및 그의 제한적인 정치적 영향력에 관하여는 HLS, “Bullinger, Heinrich”, https://hls-dhs-dss.ch/textes/d/D10443.php. ↩
일반적인 정보 제공만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글은 법률 또는 세무 자문에 해당하지 않으며, 개별 사안에 대한 자문을 대체하지 않고, 변호사와 의뢰인 간의 위임 관계를 성립시키지 않습니다. 이 글은 2026년 10월 기준의 법적 상황을 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