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야코프 로이: 위정자, 법학자, 사전 편찬자
요한 야코프 로이(Johann Jacob Leu)는 1689년 1월 26일 취리히에서 의회 의원이자 대관이던 한스 야코프 로이(Hans Jacob Leu)와 도로테아 하이데거(Dorothea Heidegger)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는 박물학자 요한 야코프 쇼이처(Johann Jakob Scheuchzer)의 제자로서 1705년 알프스 탐사에 참여하였다. 이후 1707년부터 1709년까지 독일 각지를 여행하며 마르부르크에서 법학과 자연법을 공부하였고, 1708–1709년 겨울은 네덜란드와 파리에서 보내면서 여행에 관한 상세한 일기를 남겼다. 이러한 조합은 초기 계몽주의 시대 취리히 엘리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쇼이처 아래에서 쌓은 자연과학의 기초, 독일 개신교 대학에서 받은 법학 교육, 그리고 당대의 상업·금융 수도였던 암스테르담과 파리에 대한 직접적인 견문이 그것이다.
공화국에 봉사하는 그의 경력은 전형적인 단계를 밟아 나아갔다. 그는 1709년 서기국에 들어갔고, 1710년 시립도서관 사서, 1713년 의회 대리서기, 1729년 시 서기장(Stadtschreiber)이 되었다. 1736년부터 1742년까지는 농촌 대관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의 하나인 키부르크의 대관(Landvogt)을 지냈다. 1749년에는 국가 재무관인 Seckelmeister가 되었고, 이어 1759년 취리히 시장으로 선출되었다.2 Neue Deutsche Biographie(NDB)는 키부르크 대관직의 시작을 1735년으로 보고, 사망일을 1768년 9월 10일로 기재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사소하지만, 18세기 관직자의 기본적인 정보조차 참고문헌마다 다를 수 있음을 보여 준다.3 이 장에서 중요한 관직은 재무관과 시장이다. Zinskommission(이자위원회)이 설립될 당시 로이는 국가 재정을 책임지는 관리였으며, 공화국 최고 관직에 오른 뒤에도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남았다.
스위스 문화사에서 로이는 다른 업적으로 기억된다. 그는 1747년부터 1765년까지 20권으로 된 Allgemeines Helvetisches, Eydgenössisches oder Schweitzerisches Lexicon을 간행하였다. 이는 최초로 완결된 포괄적인 스위스 백과사전이며, 그는 그 비용을 대부분 스스로 부담하였다. 이 Lexicon은 이 책 전체에서 인용되는 『스위스 역사사전』(Historical Dictionary of Switzerland)의 직계 조상이다. 두 세기 반 이상 존속하게 될 은행의 창립자로서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인물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은행가가 채무자 명부를 다루는 것과 같은 세심함으로 연방의 가문, 장소, 제도와 관직을 목록화한 사람이었다. 로이는 또한 명망 있는 법학자였다. 그는 1727년부터 1746년까지 스위스 사법(私法)에 관한 4부작 논저 Eidgenössisches Stadt- und Landrecht를 간행하였고, 스위스 국가체제에 관한 요지아스 짐러(Josias Simler)의 고전적 저술을 새로 편집하였다.4
법률가, 역사가, 재무관이라는 면모가 한 사람 안에 나란히 놓인 데에는 내적 논리가 있다. 로이가 Stadt- und Landrecht에서 정리한 스위스 사법은 상당 부분 토지 부담, 정기금, 후견 및 종교·자선 재단에 관한 법, 즉 구 연방에서 부(富)를 보유하고 이전하던 법적 형식이었다. Gülten과 Schuldbriefe에 관한 법을 체계화한 사람은 동시에 후견인, 길드, 재단의 수중에 얼마나 많은 자본이 놀고 있는지를 이해한 사람이기도 했다. 후대의 은행 전통은 그에게 “Selbst im Schlaf bin ich wach”, 즉 “잠들어서도 나는 깨어 있다”라는 좌우명을 귀속시켰으며, Credit Suisse는 2005년 은행 창립 250주년 때에도 이를 인용하였다.5
로이는 혼자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업에서 그의 주요 동반자는 한 세대 아래인 한스 콘라트 하이데거(Hans Conrad Heidegger, 1710–1778)였다. 그는 1729년 로잔과 뇌샤텔에서 현대어를 공부하였고, 베를린에서 자신의 형성에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스위스 역사사전』은 그가 그곳에서 모범적인 행정을 접하였다고 기술한다. 하이데거는 1741년 대장장이 길드 대표로 대의회에 들어갔고, 1752년 소의회 의원, 1754년 소금 관리관, 1757년 추밀원 의원, 1759년 로이의 후임으로 재무관, 1768년 시장이 되었다. 그는 1765–1773년 취리히 학교 개혁의 추진력이었으며, 1777년에는 프랑스와 스위스 주(칸톤)들 사이의 동맹을 협상하였다. 『스위스 역사사전』은 그가 취리히 자본의 해외 투자 기회를 창출하는 수단으로서 1755년 Leu & Co.의 설립을 도왔다고 평가한다.6 이렇게 창립자 두 사람은 원로 재무관과, 프로이센의 영향을 받은 개혁 세대의 떠오르는 행정가를 결합한 것이었다. 은행에 관한 후대의 역사 서술은 일관되게 두 사람 모두를 창립자로 지목한다.7
주석
- 스위스 역사사전(HLS), Marianne Zelger-Vogt, “Leu, Johann Jacob”, 2008년 11월 25일 판, https://hls-dhs-dss.ch/de/articles/015795/2008-11-25/ (https://hls-dhs-dss.ch/textes/d/D15795.php에서도 열람 가능). 이 항목은 그의 생몰일을 1689년 1월 26일부터 1768년 11월 10일까지로 제시하며, 안나 막달레나 호프마이스터(Anna Magdalena Hofmeister, 1713년) 및 도로테아 오트(Dorothea Ott, 1749년)와의 혼인을 기재하고 있다. ↩
- HLS, Zelger-Vogt, “Leu, Johann Jacob”, 앞의 글. 이 항목은 그가 1755년에 설립된 이자위원회를 주재하였으며, 이 위원회가 대외적으로 Leu & Cie.로 활동하였고 후에 Bank Leu가 되었다고 기술한다. ↩
- Schmid, “Leu, Johann Jakob”, NDB 14 (1985), 앞의 글. ↩
- HLS, Zelger-Vogt, “Leu, Johann Jacob”, 앞의 글. 이 항목은 Lexicon을 “das erste abgeschlossene, umfassende Schweizer Lexikon”이라고 기술하고 짐러 저술의 편집을 언급한다. Schmid, NDB 14 (1985), 앞의 글은 로이가 Lexicon의 비용을 개인적으로 부담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Eidgenössisches Stadt- und Landrecht를 4권으로 된 스위스 사법의 포괄적 서술로 기술한다. 현대의 연구로는 HLS 참고문헌 목록에 수록된 Claudio Soliva, Das Eidgenössische Stadt- und Landrecht des Zürcher Bürgermeisters Johann Jakob Leu, 1969가 있다. ↩
- Toni Saller, “The Big Sleep: Die Bank Leu, Teil vier”, Inside Paradeplatz, 2019년 1월 21일, https://insideparadeplatz.ch/2019/01/21/the-big-sleep-die-bank-leu-teil-vier%EF%BB%BF/. ↩
- HLS, “Heidegger, Hans Conrad”, http://www.hls-dhs-dss.ch/textes/d/D18058.php. 이 항목은 그의 생몰일을 1710년 1월 12일부터 1778년 5월 2일까지로 제시한다. ↩
- HLS, Baumann, “Bank Leu”, 앞의 글. 이 항목은 로이와 한스 콘라트 하이데거를 공동 창립자로 지목한다. 같은 취지로 Hans Fässler, Credit Suisse Group 회장 Walter B. Kielholz에게 보낸 서한, 2007년 12월 10일, https://archiv.louverture.ch/KAMPA/KRITIKEN/kielholz.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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