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골드풀에서 취리히 금시장으로
런던 금 풀, 1961–1968년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미국은 외국 통화당국이 보유한 달러를 온스당 35달러에 금으로 태환해 줄 의무를 졌다. 1954년에 다시 문을 연 런던의 민간 금시장은 공식적으로 이 체제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유시장 가격이 35달러를 크게 웃돌면 달러가 고평가되어 있다는 신호가 되어, 중앙은행들이 보유 달러를 태환하도록 부추길 것이었다. 1960년 10월 런던 금 가격이 일시적으로 약 40달러까지 치솟자, 주요 중앙은행들은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하였다. 1961년 11월 여덟 개 중앙은행이 런던 금 풀(London gold pool)을 결성하였다. 이 풀은 가격이 오를 조짐을 보이면 보유고의 금을 매도하고, 가격이 떨어지면 매입하였다. 미국은 풀 재원의 절반을 부담하였다. 독일은 11%, 영국·프랑스·이탈리아는 각각 9%, 벨기에·네덜란드·스위스는 각각 4%를 부담하였다.1 스위스 국립은행(SNB)의 참여는 제I절에서 설명한 역설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국제통화기금의 비회원국이 국제통화기금 체제의 중심 가격을 방어하는 데 힘을 보탠 것이다.
이 풀은 몇 년 동안 제 기능을 하였으나, 늘어나는 미국의 적자와 베트남 전쟁으로 무너진 수급 균형에 의존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1967년 6월 탈퇴하였다. 1967년 11월 파운드화 평가절하 이후 민간의 금 수요가 급증하였고, 이후 몇 달 동안 풀에서 대량의 보유고가 빠져나갔다. 1968년 3월 14일 저녁 미국은 영국 정부에 런던 금시장의 폐쇄를 요청하였다. 영국 재무부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3월 15일 금요일에 시장을 폐쇄한다고 발표하고, 이날을 은행 휴일로 선포하였다.2 3월 16일과 17일 주말 워싱턴에서 열린 회의에서 풀 참가국의 중앙은행 총재들은 이 약정을 해체하고 이중가격 시장을 만들었다. 중앙은행 간의 공식 거래는 계속 35달러에 이루어지고, 민간 시장은 스스로 가격을 형성하도록 한 것이다.3 런던 시장은 2주 동안 폐쇄되었다가 1968년 4월 1일 다시 문을 열었는데, 이때 미주 지역 매수자를 위해 오후 두 번째 픽싱이 도입되었다.4
취리히 풀
런던이 폐쇄된 2주는 취리히에 결정적이었다. 세 대형 은행, 즉 스위스 유니언 은행(Union Bank of Switzerland), 스위스 은행공사(Swiss Bank Corporation), 스위스 신용은행(Swiss Credit Bank)은 제휴를 맺고, 당시 세계 최대의 금 생산국이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설득하여 생산량을 자신들에게 직접 판매하도록 하였다.5 이 약정의 구조는 단순하였다. 세 은행은 매입에 대해 조율된 매수 호가를 제시하였다. 풀로 매입된 금은 각 은행이 개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각 은행은 자체 매도 호가로 자기 고객에게 이를 판매하였다. 이처럼 이 풀은 생산자에 대한 공동 매입 포지션과 유통 단계의 경쟁을 결합하였다. 이 약정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금을 판매하던 남아프리카 준비은행(South African Reserve Bank)과 세 은행 모두에게 적합하였다.
스위스 국립은행은 원래 이 움직임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스위스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관계에 관한 스위스 국립과학재단(Swiss National Science Foundation)의 연구 프로그램은, 스위스 국립은행이 국내외의 파장을 우려하여 1968년 이전에는 남아프리카 금 판매를 런던에서 취리히로 옮기는 데 반대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중가격 시장의 창설은 이 판단을 바꾸어 놓았다. Sébastien Guex와 Bouda Etemad가 요약하듯이, 스위스 은행들은 1968년 3월 매입 풀을 만들어 재빨리 런던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다소 망설인 끝에 취리히를 통해 상당한 양의 금을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두 저자는 스위스 은행가들과 남아프리카 측 상대방 사이의 인적 관계가 은행들의 시장 진입에 결정적이었다고 강조한다.6 역사학자 Sandra Bott는 1945년부터 1968년까지 전 기간에 걸쳐 남아프리카 금을 둘러싼 취리히와 런던의 경쟁을 검토하였다.7
이 새로운 약정에 대한 당대 미국의 시각은 1969년 Time에 실렸다. 이 잡지는 새로 채굴된 남아프리카 금을 매입하기 위해 약 1년 전에 결성된 Credit Suisse, 유니언 은행, 스위스 은행공사의 신디케이트를 묘사하였다. 그 목적은 두 가지였다. 취리히를 런던의 도전자로 세우는 것과 재판매에서 마진을 얻는 것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은행들은 가격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수요가 강할 때에만 산업 수요자, 금 비축자, 투기꾼에게 판매하였다. 시장이 약해지면 런던에서 금을 추가로 매입하여 자유시장 가격을 온스당 약 40달러로 유지하였다. 196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생산량은 약 5억 6,000만 달러 규모로 스위스 은행들이 소화할 수 있는 양을 넘었기 때문에, 포르투갈 중앙은행은 다른 중앙은행들과 보조를 달리하여 남아프리카 금을 공식 가격에 매입하였다.8 이 묘사는 취리히 풀이 수동적인 중개자 이상이었음을 보여 준다. 한동안 이 풀은 중앙은행들이 막 포기한 역할, 즉 민간 금시장에서 가격을 떠받치는 카르텔로 기능하였다.
1970년대 최대의 금 중심지 취리히
1970년대에 취리히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실물 금시장이 되었다는 데 이견이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계속해서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세 은행을 통해 판매하는 한편, 두 번째로 큰 생산국인 소련은 취리히를 서방의 주요 판매 창구로 활용하였다. 소련의 판매 수단은 Wozchod Handelsbank였다. 이 은행은 1966년 6월 22일 스위스 최초의 소련 은행으로 취리히에 설립되었으며, 소련 국립은행과 대외무역은행 등 소련 국가기관이 소유하였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이 은행을 이끈 Yuri Karnaukh 행장 아래에서 이 은행은 금 판매의 거점이 되었고, Credit Suisse와 Deutsche Bank 등 서방 은행들과 협력하여 연간 200~300톤 규모의 소련산 금괴 판매 전체를 처리하였다. 1984년 11월 거래 손실이 공개된 후 이 은행은 1985년에 청산되었다.9 소련의 금은 정기 항공편으로, 남아프리카의 금은 세 대형 은행을 통해 취리히에 도착하는 모습은 냉전기 스위스 금융 중심지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즉 이 금융 중심지는 양 진영 모두와, 그리고 세계 상당 부분이 보이콧하기 시작한 국가들과도 거래하였다.
스위스 무역 통계의 수치는 그 규모를 보여 준다. Guex와 Etemad에 따르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부터의 금화 수입은 1968년부터 1984년 사이에 4억 프랑을 조금 넘는 수준에서 15억 프랑 이상으로 늘어났다. 금괴와 주괴의 수입은 1981년까지 급증한 뒤 연간 약 200억 프랑 수준에서 안정되었다.10 2차 자료들은 취리히 시장이 전성기에 세계 신규 채굴 금의 매우 큰 몫, 때로는 약 70%로 제시되는 몫을 처리하였으며, 스위스 유니언 은행이 남아프리카 공급자의 주된 금융 파트너였다고 주장한다.11 정확한 비중이 어떠하든, 실제적인 결과는 1970년대 세계 금 가격이 상당 부분 취리히 세 은행의 딜링룸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런던이 픽싱과 로코 런던(loco London) 결제 시스템의 중심이라는 역할을 유지하였음에도 그러하였다.
취리히의 금 사업에는 거래 풀보다 오래 살아남은 산업적 측면이 있었다. 대형 은행들은 남아프리카와 소련의 금괴를 고객이 원하는 소형 금괴와 금화로 가공하기 위해 정련소를 인수하거나 건설하였다. 예를 들어 Credit Suisse는 티치노주(칸톤)의 정련소 Valcambi를 인수하여 자체 주괴와 금화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12 1974년 말부터 미국 시민의 금 보유를 다시 허용한 미국의 결정, 그리고 금 가격이 일시적으로 온스당 800달러를 넘었던 1979년과 1980년의 극심한 가격 변동은 은행들에게 기록적인 거래량을 가져다주었다. 정련 사업은 이후 풀이 쇠퇴한 뒤에도 살아남았다. 오늘날 스위스 정련소는 세계 연간 정련 생산량의 약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Argor-Heraeus, Valcambi, PAMP, Metalor의 네 대형 정련소가 이 부문을 지배하고 있다.13
취리히 금 거래의 정치적 맥락 또한 변하였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금 거래는 스위스와 이 나라의 경제 관계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측면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스위스 국립과학재단의 국가연구프로그램 42+(National Research Programme 42+)가 훗날 이를 검토하였다. 취리히 금융 중심지의 역사가에게 이 일화는 세 가지를 보여 준다. 다른 곳에 규제 공백이 생겼을 때 세 대형 은행이 얼마나 빨리 행동할 수 있었는지, 그들의 사업이 스위스가 순전히 상업적인 문제로 다루기를 선호한 외교 정책 문제와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 있었는지, 그리고 1968년 3월의 두 주 동안 만들어진 제도적 이점이 반세기에 걸쳐 한 산업 전체를 형성할 수 있었는지가 그것이다.
주석
- Wikipedia, “London Gold Pool”, 분담률 표 포함, https://en.wikipedia.org/wiki/London_Gold_Pool. 이 항목은 Bordo, Monnet and Naef (2019) 및 국제결제은행(BIS)의 연표를 인용한다. 1960년 10월의 약 40달러라는 수치와 1954년 런던 시장의 재개장은 문헌에서 표준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나, 여기서는 별도로 확인한 출처 없이 제시한다. ↩
- World Gold Council, After the Gold Standard, 1931–1999, vol. III, 1968년 3월 15일자 문서, https://www.gold.org/sites/default/files/documents/after-the-gold-standard/1968mar15.pdf. ↩
- Wikipedia, “London Gold Pool”, 붕괴에 관한 부분, https://en.wikipedia.org/wiki/London_Gold_Pool. ↩
- London Bullion Market Association (LBMA), “March 1968 and the London Gold Fixing”, https://www.lbma.org.uk/wonders-of-gold/items/march-1968-and-the-london-gold-fixing. ↩
- BullionStar, “Swiss Gold Market”, Gold University, https://www.bullionstar.com/gold-university/swiss-gold-market. 이 글은 귀금속 거래상이 발행한 것으로, 풀의 구조를 상세히 설명한다. ↩
- Sébastien Guex and Bouda Etemad, “Economic relations between Switzerland and South Africa”, 스위스 국립과학재단 국가연구프로그램 42+의 연구 요약, https://www.snf.ch/media/en/6SfskXAzNq6FUwz9/nfp42p_guex-e.pdf. ↩
- Sandra Bott, “South African Gold at the Heart of the Competition between the Zurich and London Gold Markets at a Time of Global Regulation, 1945–68”, in Sandra Bott (ed.), The Global Gold Market and the International Monetary System from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Present (Palgrave Macmillan, 2013), 장(章) 페이지 및 초록: https://link.springer.com/chapter/10.1057/9781137306715_6. ↩
- Time, “Money: Where the Gold Has Gone”, 1969, https://time.com/archive/6637230/money-where-the-gold-has-gone/. ↩
- Wikipedia, “Wozchod Handelsbank”, https://en.wikipedia.org/wiki/Wozchod_Handelsbank. 이 항목은 Financial Times와 New York Times의 당대 보도에 의존한다. 아울러 소련 Wozchod 은행 스위스 지점의 손실에 관한 United Press International의 1984년 11월 30일자 보도, https://www.upi.com/Archives/1984/11/30/The-Swiss-branch-of-the-Soviet-Unions-Wozchod-Bank/9185470638800/ 참조. ↩
- Sébastien Guex and Bouda Etemad, “Economic relations between Switzerland and South Africa”, NRP 42+ 연구 요약, https://www.snf.ch/media/en/6SfskXAzNq6FUwz9/nfp42p_guex-e.pdf. ↩
- Wikipedia, “Zürich Gold Pool”, https://en.wikipedia.org/wiki/Z%C3%BCrich_Gold_Pool. 이 항목은 1970년대에 취리히가 세계 전체 금 생산량의 약 70%를 거래하였으며, 1968년 이후 풀, 특히 UBS가 남아프리카 공급자의 주된 금융 파트너가 되었다고 기술한다. ↩
- BullionStar, “Swiss Gold Market”, https://www.bullionstar.com/gold-university/swiss-gold-market: Credit Suisse는 1967년 Valcambi 지분 50%를, 1968년 추가로 30%를, 1980년 나머지 20%를 인수하였다. FundingUniverse, “History of Credit Suisse Group”, https://www.fundinguniverse.com/company-histories/credit-suisse-group-history/, “the precious metals refinery Valcambi S.A., in Ticino, a manufacturer of ingots and coins”의 인수에 관하여. ↩
- BullionStar, “Swiss Gold Market”, https://www.bullionstar.com/gold-university/swiss-gold-market. 이 글은 스위스의 비중을 세계 연간 정련 생산량의 65~70%로 제시한다. ↩
일반적인 정보 제공만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글은 법률 또는 세무 자문에 해당하지 않으며, 개별 사안에 대한 자문을 대체하지 않고, 변호사와 의뢰인 간의 위임 관계를 성립시키지 않습니다. 이 글은 2026년 10월 기준의 법적 상황을 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