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商社)에서 프라이빗 뱅크로
Schulthess 상사의 행로
이 장의 서두에서 다룬 Schulthess 상사의 역사는 상인 상사가 어떻게 은행이 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1750년 Caspar Schulthess와 Hans Conrad Schulthess가 Zum gewundenen Schwert 저택에서 설립한 견직물 사업은 견직물 거래와 더불어 유가증권 및 환어음 업무를 영위하였다. 생사(生絲) 매입 자금을 조달하고 수출 대금을 회수할 필요에서 생겨난 이 부수 업무가 결국 주된 업무가 되었다. 1805년에 이르러 Caspar Schulthess sel. Erben & Schinz 상사는 은행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1855년부터는 Heinrich Schulthess 아래에서 오로지 은행업에만 집중하였다.1 1882년 Louis Rahn-Bärlocher가 회사에 합류하였다. 새로운 연방 「스위스 채무법」(CO)의 시행과 파트너 구성의 변화를 거쳐, 회사는 1893년 Escher & Rahn이라는 상호를 채택하였다. 1917년 Max Bodmer-Schindler가 파트너로 합류하면서 Rahn & Bodmer가 되었다. Bodmer-Schindler는 1934년 설립된 스위스 개인은행가협회 정관의 공동 기초자이자 초대 회장이었다.2
견직물 상인에서 개인 은행가로 이어지는 이 연쇄는 전형적이다. 18세기 취리히의 상인 상사는 훗날 분리되는 여러 기능을 하나의 기업 안에 결합하고 있었다. 상품 거래, 생산 금융, 어음과 통화 거래, 가문과 그 지인들의 자본 관리, 그리고 국내외 유가증권 투자가 그것이다. 19세기에 섬유업이 공업화되어 공장과 기계에 대한 고정자본을 필요로 하게 되자, 일부 상사는 산업 기업으로, 다른 상사는 은행으로 전환하였다. Hans Caspar Escher가 은행가 Salomon von Wyss와 함께 설립한 1805년의 Escher, Wyss & Cie 면방적 공장은 산업화의 문턱에서 두 경로가 만나는 모습을 보여 준다.3
원(原)공업 경제의 유산
17세기와 18세기의 원공업 경제는 취리히 금융 중심지에 무엇을 남겼는가? 네 가지 요소가 두드러진다.
첫째는 자본이다. 선대제, 무역 독점, 그리고 견직물과 면직물 수출에서 나온 이윤은 두 세기에 걸쳐 한정된 수의 가문과 기관에 의하여 축적되었고, 국내외에 투자되었으며, 가문 기금, 길드 기금, 공공 기관을 통하여 보존되었다. 1834년 110만 굴덴이 넘는 상인이사회(Direktorium)의 자산과 이자위원회(Zinskommission)를 통하여 해외에 투자된 자금은 그러한 축적의 제도적 표현이다. 1848년 이후 취리히가 철도, 은행, 보험회사를 위한 자본을 필요로 하였을 때, 취리히는 이 축적된 자본을 활용할 수 있었다. 1856년 Kreditanstalt의 설립자들과 대형 보험회사들의 설립자들(D부 참조)은 상당 부분 이 장에서 다룬 가문들 출신이었다.
둘째는 수출 지향성이다. 취리히의 원공업은 먼 시장에 의존하여 존립하였다. 원료는 이탈리아, 스페인, 레반트에서 매입하였고, 완제품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잉글랜드와 그 너머에 판매하였다. 상인들은 여러 통화, 관할권, 법체계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거래처에 의존하며, 위험에 가격을 매기는 법을 익혔다. 업무의 상당 부분이 국경 간 거래이고, 고객과 자산이 국제적이며, 규제 체계가 국제 기준에 의하여 형성되는 오늘날의 취리히 금융 중심지는 그 전통 위에 서 있다.
셋째는 신용 네트워크이다. 선대제는 도시와 농촌, 그리고 도시와 해외 시장을 잇는 신용 관계의 망이었다. 그것이 만들어 낸 관행, 즉 신용도의 평가, 채권의 문서화, 채무의 집행, 어음의 유통은 은행이 존재하기 이전의 은행업의 일상적 실무였다. 농촌 가계의 화폐경제화와 신용에 대한 친숙함은 19세기의 저축은행과 주(칸톤) 은행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넷째는 공법상 상인 조직이라는 제도적 모델이다. 선출된 이사, 공적 기능, 독자적 자산을 갖춘 Kaufmännisches Direktorium은 후대의 상공회의소와 자율규제기관을 예고하였다. 1834년 주 상공회의소가 이를 대체한 것은 앙시앵 레짐의 신분제적 질서에서 19세기 자유주의 질서로의 이행을 표시하지만, 경제 단체가 경제의 운영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관념은 그 이행을 넘어 살아남았다.
제네바와의 비교
자매 권(卷)의 주제인 제네바와 간략히 비교하면 그림이 더 선명해진다. 두 도시 모두에서 18세기에는 해외에 자금을 빌려주고 고객의 자본을 외국 공공 부채에 투자하는 상인 은행가들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제네바에서는 은행업이 더 일찍, 더 멀리 발전하였다. 그 원동력은 프랑스와의 긴밀한 유대, 위그노 망명, 그리고 영토가 거의 없는 도시국가의 시계 제조 및 무역 경제였다. 취리히에서 은행업은 넓은 농촌 배후지에 뿌리를 둔 섬유 경제로부터 더 천천히 성장하였으며, 이자위원회를 통하여 스스로의 계산으로 투자하기도 한 길드 국가의 밀접한 감독 아래 있었다. 18세기 제네바의 은행가들은 대체로 금융 전문가였다. 취리히의 은행가들은 화폐도 취급하는 섬유 상인이었다. 이러한 기원의 차이는 19세기 취리히 금융 중심지가 산업, 철도, 보험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발전한 반면, 제네바는 개인 자산관리와 국제 금융에 더 강하게 지향된 채로 남은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주석
- Rahn+Bodmer Co., “History” 및 “275 Jahre Innovation und Tradition”(앞의 인용). ↩
- Rahn+Bodmer Co., “History”(앞의 인용). ↩
- 스위스 역사사전(HLS), Carl, Zeuske, “Escher, Hans Caspar”(앞의 인용). Escher는 1793년 견직물 상인으로서 수련을 시작하였다. 회사는 1829년부터 스위스 최대의 기계 제작 공장으로 발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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