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언어로서의 영어
계약: 영어, 스위스법 또는 영국법
영어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국제 자본시장을 통해 취리히 금융 중심지에 들어왔다. 당시 스위스 은행들은 유로본드 시장과 국제 신디케이트 대출의 주요 참여자가 되었다. 이들 시장의 계약 문서는 영어로 작성되었고 대개 영국법이나 뉴욕주법을 준거법으로 하였으며, 스위스 은행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오늘날 국제 금융의 계약 문서는 런던과 뉴욕에 기반을 둔 업계 단체들이 만든 표준 양식이 지배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파생상품에 관한 ISDA 기본계약서(ISDA Master Agreement)와 신디케이트 대출에 관한 Loan Market Association의 권고 양식이며, 이들은 모두 영어로 작성되고 대개 영국법이나 뉴욕주법을 준거법으로 한다.1 따라서 런던의 거래상대방과 파생상품을 거래하거나 다국적 차입자에 대한 신디케이트 대출에 참여하는 취리히의 은행은 영어로, 그리고 외국법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럼에도 취리히에서 체결되는 계약 가운데 상당 부분은 여전히 스위스법을 준거법으로 선택하며, 그중에는 영어로 작성된 계약도 많다. 스위스 차입자에 대한 국내 신디케이트 대출, 스위스 채권 발행, 스위스 회사의 주식매매계약, 스위스 은행의 자산관리 위임계약은 영어로 작성되면서 스위스법을 준거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스위스 국제사법은 「연방 국제사법」(PILA) 제116조에서 준거법을, 같은 법 제5조에서 관할 법원을 선택할 폭넓은 자유를 당사자에게 부여한다. 문서의 언어로서의 영어와 준거법으로서의 스위스법이 결합되면 앞서 설명한 상황이 생긴다. 즉, 영어로 된 계약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텍스트를 구속력 있는 텍스트로 하는 스위스 법률에 비추어 해석되는 것이다. 이러한 계약을 작성하는 법률가는 스위스의 법 개념을 영어 단어로 표현하되, 그 단어가 영국법에서 갖는 함의를 들여오지 않아야 한다. 스위스법을 준거법으로 하는 영문 주식매매계약의 “warranty”는 매도인의 책임에 관한 스위스 규정에서 그 의미를 얻으며, 스위스 문서에 나오는 “trust”는 「신탁의 준거법 및 승인에 관한 헤이그 협약」과 스위스 국제사법에 따라 분석해야 한다.
국제 계약의 준거법으로서 스위스법이 갖는 장점은 잘 알려져 있다. 「스위스 채무법」(CO)은 간결하고 접근하기 쉬우며 영어 번역본도 있다. 그 계약법 일반원칙은 국제 금융의 구조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하다. 스위스 법원과 연방대법원은 오랜 상사 판례의 축적을 갖고 있으며, 스위스법은 서로 다른 법 전통을 가진 당사자들에게 중립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단점은 언어에 있다. 스위스 계약법은 거의 전적으로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쓰인 학설과 판례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조항이 어떻게 해석될지를 좌우하는 주석서들은 대부분 영어로 접할 수 없으므로, 스위스법을 선택한 외국 당사자는 자신의 계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을 듣기 위해 스위스 변호사에게 의존해야 한다. 취리히의 법률사무소들은 스위스법에 관한 영문 안내서를 발간하고 있지만, 영문 문헌과 독일어·프랑스어 학설 사이의 격차는 여전히 상당하다.
법정에서의 영어
오랫동안 민사법원은 공용어의 마지막 보루였다. 「스위스 민사소송법」(CPC) 제129조는 예외 없이 소송을 관할 주(칸톤)의 공용어로 진행하도록 규정하였다. 2025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2023년 3월 17일의 개정은 이 보루를 열었다. 이제 제129조 제2항은 주법이 당사자의 공동 신청이 있는 경우 상사법원 또는 일반법원에서 다른 국어를 사용하거나, CPC 제6조 제4항 c호에서 말하는 국제 상사분쟁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도록 허용할 수 있게 한다.2 취리히주는 이 가능성을 취리히 국제상사법원(Zurich International Commercial Court) 구상에 활용하였다. 이 법원은 기존 상사법원의 한 재판부로 구상되었으며, 모든 당사자의 신청이 있으면 국제 상사소송을 영어로 진행하게 된다. 이 구상의 경과, 주 법안 및 한계는 제I.I장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언어 인프라의 관점에서는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할 만하다. 첫째, 법정에서의 영어 사용은 모든 당사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공용어는 여전히 독일어이므로, 영어에 동의하지 않은 당사자는 독일어로 소송을 진행할 것을 고집할 수 있다. 따라서 영어는 독일어를 밀어내지 않으면서 인프라에 추가되는 것이며, 이는 다언어주의 전반에 대한 스위스의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둘째, 이 개혁은 오래전부터 비공식적으로 존재해 온 관행을 공식화한다. 취리히 상사법원은 이미 영어로 된 증거서류를 번역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재판부 구성에 따라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당사자들과 화해기일을 직접 영어로 진행하기도 한다. 이처럼 입법은 취리히 사법부가 이미 갖추고 있던 언어 역량을 인정한 것이다.3 연방대법원에 대한 상소는 영어 선택권의 예외로 남아 있다. 연방대법원은 공용어로 소송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다만 2021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PILA 제12장 개정과 함께 도입된 「연방대법원법」 제77조 제2bis항에 따라, 중재 관련 상소에서는 서면을 영어로 제출할 수 있다.
감독에서의 영어
스위스 금융시장감독청(FINMA)은 「연방 행정절차법」의 적용을 받는 연방 당국이다. 같은 법 제33a조는 절차를 공용어 중 하나로, 원칙적으로 당사자가 신청을 제출하였거나 제출할 언어로 진행하도록 규정한다. 실무에서 FINMA의 규정과 간행물은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흔히 영어판과 함께 발간되며, FINMA는 업무의 여러 분야에서 영어를 받아들인다. 예컨대 FINMA의 핀테크 창구는 공용어인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또는 영어로 문의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4 FINMA는 은행 인가 신청 양식도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로 제공한다.5 대형 국제 금융기관의 내부 문서는 대부분 영어로 작성되므로, FINMA가 이들 기관을 감독하면서 검토하는 자료의 상당 부분도 영어로 되어 있다.
행정법은 당국이 번역을 생략하는 것도 허용한다. 스위스 행정절차에 관한 표준 교재는 절차의 언어가 통상 당사자의 신청이 작성된 언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공용어로 작성되지 않은 서류에 관해서는 「연방 행정절차법」 제33a조 제3항 및 제4항을 언급하는데, 이에 따르면 당국은 다른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번역을 면제할 수 있다.6 그럼에도 FINMA의 공식 결정, 즉 처분과 제재 결정은 공용어로 발령된다. FINMA의 처분을 독일어로 받은 외국 은행은 이를 읽을 수 있거나 번역하게 해야 한다. 그 은행을 구속하고 장크트갈렌 소재 연방행정법원이 심사하는 것은 독일어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업무 언어로서의 영어와 구속력 있는 행위의 언어로서의 독일어가 결합되는 것은 스위스식 접근 방식의 전형이다.
중재에서의 영어
영어가 가장 많이 진출한 분야는 중재이다. 스위스의 국제중재는 PILA 제12장의 규율을 받으며, 이 장은 절차의 언어를 당사자가 자유롭게 정하도록 한다. 취리히와 제네바는 세계 유수의 국제중재 중재지에 속한다. 2021년 스위스 상공회의소들의 기관에서 출범한 스위스중재센터(Swiss Arbitration Centre)는 2024년에 100건의 신규 사건을 접수하였다. 그중 82%는 적어도 한 당사자가 스위스에 등록되어 있지도 주소를 두고 있지도 않다는 의미에서 국제 사건이었고, 당사자는 37개국 출신이었으며, 절차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로 진행되었다.7 2021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PILA 제12장 개정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였다. 개정법은 중재판정 취소 절차에서 당사자가 연방대법원에 영어로 서면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하고, 외국 이용자가 스위스 중재법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취리히 금융 중심지에서 영어로 진행되는 중재는 업무의 국제적 성격과 법의 스위스적 성격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당사자 일방이 외국 금융기관이거나 국가인 경우 은행·금융 분쟁은 중재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건의 중재인, 대리인, 전문가는 흔히 여러 법역 출신이며 영어로 소통한다. 실체에는 스위스법이 적용되고 중재에는 스위스 절차법이 적용될 수 있지만, 절차의 언어는 영어이다. 따라서 취리히의 중재 변호사 집단은 스위스 법조계에서 영어 능력이 가장 뛰어난 집단 중 하나이며, 그 구성원들은 독일어로 진행되는 국가법원 소송과 영어로 진행되는 중재를 일상적으로 오간다.
회사 언어와 외국인 주재원 사회
취리히의 대형 은행, 보험회사, 자산운용사에서 영어는 회사 공용어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영업하는 기관의 이사회 자료, 리스크 보고서, 컴플라이언스 매뉴얼, 내부 커뮤니케이션은 영어로 작성된다. 취리히의 일부 고위 경영진은 업무 수준의 독일어 능력 없이 일한다. 스위스 회사법상의 공식 문서는 예외로 남아 있다. 상업등기 신청과 등기 자체는 해당 주의 공용어로 해야 하며, 취리히에서는 이것이 독일어를 뜻한다. 정관이나 주주총회 의사록 같은 첨부서류가 다른 언어로 제출되는 경우 등기소는 번역을 요구할 수 있다.8 그러므로 취리히의 회사는 영어 상호를 쓰고, 영어로 업무를 수행하고, 영어로 이사회 자료를 작성하면서도 법정 서류는 독일어로 제출할 수 있다. 이러한 결합은 언어 인프라의 여러 층위가 서로 업무를 어떻게 나누는지를 보여 준다.
이 영어권 세계를 떠받치는 외국인 주재원 사회의 규모는 상당하다. 앞서 인용한 시 통계에 따르면 2019~2021년에 15세 이상 주민의 거의 14%가 영어를 주언어로 꼽았다. 전국적으로는 2023년에 취업자의 23%가 직장에서 영어를 사용하였다.9 이 공동체는 국제학교, 영어 매체, 교회와 클럽, 그리고 점점 더 많아지는 영어 공공서비스의 지원을 받는다. 금융 중심지에 외국인 주재원 사회는 자산이자 과제이다. 이들은 현지 노동시장이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는 전문 역량을 제공한다. 동시에 영어로 생활하며 독일어를 거의 배우지 않는 공동체는 스위스의 정치·사회 생활의 주변부에 머물게 되며, 이는 이 도시에 대한 장기적 헌신을 제약할 수 있다.
주석
- ISDA 기본계약서(1992년판 및 2002년판)는 영국법과 뉴욕주법 사이의 선택을 규정한다. Loan Market Association은 주로 영국법에 따른 권고 양식을 발간한다. ↩
- 2025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개정본(2023년 3월 17일 개정)의 「스위스 민사소송법」(ZPO) 제129조, 조문은 swissrights.ch에 수록, https://www.swissrights.ch/gesetze/Artikel-129-ZPO-2025-DE.php. ↩
- Regierungsrat des Kantons Zürich, Antrag vom 2. Juli 2025, Vorlage 6034, https://www.zh.ch/bin/zhweb/publish/regierungsratsbeschluss-unterlagen./2025/721/6034_GOG_Aenderung.pdf, 제I.I장에서 검토: “Gegenwärtig dürfen Klagebeilagen in englischer Sprache eingereicht werden, was ein Verfahren nicht nur beschleunigt, sondern für die Parteien auch kostspielige Übersetzungen entbehrlich macht.” 이 보고서는 재판부 구성에 따라 법원과 영어를 사용하는 당사자들이 화해기일에 직접 영어로 소통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
- FINMA, “Authorisation enquiries and ICOs”, https://www.finma.ch/en/authorisation/fintech/unterstellungsanfragen-und-icos/: “Enquiries may be submitted in the official languages (German, French and Italian) or in English to FINMA’s FinTech desk.” ↩
- FINMA, “Banks: getting licensed”, https://www.finma.ch/en/authorisation/banks-and-securities-firms/getting-licensed/banks/, 신청 양식을 DE, FR, IT, EN으로 제공한다. ↩
- Universität Zürich, Rechtswissenschaftliches Institut, Lehrstuhl Kley, Verwaltungsverfahrensrecht, 제4.1.2장 “Verfahrensform”, https://www.rwi.uzh.ch/elt-lst-kley/vwvr/verfahren/de/html/chapter_1_12.html. ↩
- Swiss Arbitration Association, “Swiss Arbitration Centre – Annual Report 2024”, https://www.swissarbitration.org/update-from-the-swiss-arbitration-centre-2024/. 신규 사건 중재합의의 약 3분의 2는 여전히 이 센터의 전신 기관을 지정하고 있었다. ↩
- 2007년 10월 17일 「상업등기령」(HRegV, SR 221.411), droit-bilingue.ch의 2개 언어 대역판. 제16조 제4항: “Die Anmeldungen sind in einer der Amtssprachen des Kantons abzufassen, in dem die Eintragung erfolgt”, https://www.droit-bilingue.ch/de-fr/2/22/221.411-16-26.html. 제29조: 등기는 신청의 언어로 한다, https://www.droit-bilingue.ch/de-fr/2/22/221.411-29-41.html. 제20조 제4항: 첨부서류가 해당 주의 공용어가 아닌 언어로 제출되는 경우 등기소는 번역을 요구할 수 있다, https://www.droit-bilingue.ch/de-fr/2/22/221.411-20-30.html. ↩
- SRF News, “Nicht-Landessprachen auf dem Vormarsch”, 앞의 글. ↩
일반적인 정보 제공만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글은 법률 또는 세무 자문에 해당하지 않으며, 개별 사안에 대한 자문을 대체하지 않고, 변호사와 의뢰인 간의 위임 관계를 성립시키지 않습니다. 이 글은 2026년 10월 기준의 법적 상황을 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