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과 소상공인을 위한 저리 신용
취리히 농촌 지역의 신용 문제
주립은행을 지지하는 경제적 논거는 주(칸톤)의 농촌 신용 구조에 근거하였다. 취리히의 농업은 중소 규모 농가가 지배하였으며, 그중 다수는 섬유산업의 가내 노동을 겸하였다. 이들 가구는 토지 매입, 상속, 건물을 주택담보대출로 조달하였다. 이들은 민간 대주, 19세기 초 이래 확산된 저축은행, 공증인, 그리고 도시의 부유한 가문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저축은행은 규모가 작고 지역적이었으므로 대출 여력이 제한적이었다. 1830년대 이래 취리히에 등장한 대형 은행들, 특히 1836년의 Bank in Zürich와 1856년의 Kreditanstalt는 은행권 발행, 상업어음, 철도금융, 산업신용에 집중하였다(C부 및 D.II장 참조). 은행 창립 150주년에 스위스 라디오가 인용한 경제사학자 마티아스 비스만(Matthias Wiesmann)에 따르면, 주는 신용 부족과 과도한 이자율에 시달렸으며, 그 결과 상공업과 농업은 투자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다.1
1860년대의 이자율 상승은 이 문제를 첨예하게 만들었다.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오르자, 변동금리로 돈을 빌린 농민들은 섬유 가내 노동에서 얻는 소득이 줄어드는 가운데 더 높은 연간 부담에 직면하였다. 대출을 회수하는 채권자는 농장의 매각을 강제할 수 있었다. 민주파 언론은 이러한 종속을 도덕적·정치적 언어로 묘사하였다. 민주파의 시각에서 상환 연장을 위하여 부유한 대주를 찾아가야 하는 채무자는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자유롭지 않았다. 자신의 담보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의 이익에 반하여 투표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온건한 금리와 투명한 조건으로, 차주의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대출하는 국가 은행은 그를 이러한 종속에서 해방시킬 것이었다.
요한 야코프 켈러, “Bankvater”
이 강령을 구체적인 기관으로 옮긴 인물은 취리히 오버란트 피셴탈 출신의 요한 야코프 켈러(Johann Jakob Keller)였다. 1823년 3월 27일 란첸모스에서 소농이자 가내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켈러는 아버지의 직조업이 무너지자 학업을 포기해야 하였다. 1843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그는 가업인 섬유업을 운영하고 자수 무역에 종사하였으며, 자신의 산업 기업을 일구었다. 1860년 뮐레바흐에서 기계 직조 허가를 받은 뒤, 1863년 깁스빌에 7,000개의 방추를 갖춘 방적공장을 세웠고, 1883년 아들들에게 넘겨줄 때에는 방추가 12,500개로 늘어나 있었다. 켈러는 1851년부터 1855년까지 피셴탈 기초자치단체(게마인데)의 장, 지구 판사, 1854년부터 대평의회 의원, 1868~1869년 헌법평의회 위원, 그리고 1869년부터 1893년까지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다.2 그는 민주주의 운동이 오버란트에서 배출한 유형에 속하였다. 즉 농민 세계에 깊이 뿌리를 두고, 도시를 경계하며, 정치적 자유에는 경제적 독립이 필요하다고 확신한 자수성가형 농촌 제조업자였다.
주립은행을 위한 켈러의 운동은 민주파의 봉기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1852년 피셴탈 기초자치단체는 그의 첫 제안을 주정부에 제출하였다. 1866년 켈러는 대평의회 의원으로서 이를 다시 제기하였다. 1868년 1월 구(舊)다수파가 지배하는 위원회가 이 사업을 묻어 버렸으며, 보수적인 재무국장 펠릭스 빌트(Felix Wild)도 이에 반대하였다.3 켈러의 논거는 재정적인 것인 만큼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경제적 종속이 정치적 종속으로 바뀐다고 주장하였다. 시민들이 자본가와 민간 은행에만 의존할 필요 없이 언제든지 국가 은행을 찾을 수 있다면, 그들은 더 애국적이 되고 채권자에 대하여 더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주장을 펴기 위하여 민주파 신문인 Volksblatt vom Bachtel과 Landbote를 활용하였으며, 운동의 과제를 그릇된 손에 넘어간 국가 기계를 수리하는 일로 묘사하였다.4
헌법 투표를 앞둔 1869년 3월 20일, 켈러는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NZZ)에 주립은행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문장은, 은행이 단 1,000명의 시민만이라도 자본가의 손에서 구해 낸다면 이 1,000명이 다른 1만 명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하였다.5 헌법평의회 위원으로서 켈러는 농촌 주민의 신용 수요를 위한 국가 은행을 헌법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그는 “Bankvater”, 즉 은행의 아버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869년부터 1899년까지 은행이사회(Bankrat) 위원으로 재직하였으며, 이로써 은행의 첫 30년 동안 창립 강령과 기관을 가장 지속적으로 이어 준 인물이 되었다.6 『Tages-Anzeiger』는 켈러를 보다 급진적인 뷔르클리(Bürkli)의 온건한 동맹자로 묘사한다. 켈러는 뷔르클리의 공공신용 구상을 유권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기관으로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7
자유주의 기득권층의 반대
에셔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엘리트는 은행에 반대하였다. NZZ는 에셔 파벌이 민간 기관에 대한 과도한 경쟁을 우려하였다고 보도한다. 이 갈등은 “체제”와 그 반대 세력 사이의 보다 넓은 투쟁의 일부로 전개되었다.8 자유주의자들의 반론은 원칙과 이해관계를 결합한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1848년의 자유주의자들은 은행업을 민간 기업의 영역으로 보았으며, 국가가 민간 자본과 경쟁하며 예금을 받고 대출을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실제로는 무제한 보증을 갖춘 국가 은행은 기존 은행과 저축기관으로부터 저축을 끌어갈 것이었다. 더욱이 자체 은행권을 발행하는 은행은 1830년대부터 은행권을 발행해 온 Bank in Zürich와 경쟁하게 될 것이었다. Kreditanstalt 자체는 철도·산업·국제 금융에 업무가 있었으므로 덜 직접적으로 위협받았으나, 그 설립자들은 민주파가 자신들에 맞서는 도구로 구상한 은행의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 다수를 잃었기 때문에 논쟁에서 패하였다. 1869년 헌법이 채택되자 은행의 설립은 헌법상 의무가 되었다. 남은 문제는 은행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와 얼마나 빨리 업무를 시작할 수 있는가뿐이었다. 농촌에서 민주주의 운동이 지닌 사회적 비중은 그 답이 농민과 소상공업자의 필요를 반영하고, 새 기관이 국민과 그 선출된 대표에게 종속되도록 보장하였다.
주석
- Schweizer Radio und Fernsehen (SRF), “150 Jahre Zürcher Kantonalbank – ‘Die Bürger aus den Händen der Kapitalisten retten’”, 2020, https://www.srf.ch/news/wirtschaft/150-jahre-zuercher-kantonalbank-die-buerger-aus-den-haenden-der-kapitalisten-retten. ↩
- Wikipedia(독일어판), “Johann Jakob Keller (Politiker)”, https://de.wikipedia.org/wiki/Johann_Jakob_Keller_(Politiker). ↩
- Neue Zürcher Zeitung, “Sicheres Geld für freie Bürger: Wie ein Zürcher Fabrikant gegen die liberalen Eliten für eine Kantonalbank kämpfte”, https://www.nzz.ch/zuerich/sicheres-geld-fuer-freie-buerger-wie-ein-zuercher-fabrikant-gegen-die-liberalen-eliten-fuer-eine-kantonalbank-kaempfte-ld.1474134. ↩
- NZZ, “Sicheres Geld für freie Bürger”(앞의 인용). ↩
- NZZ, “150 Jahre Zürcher Kantonalbank: ZKB, Retterin vor ‘Kapitalisten’”(앞의 인용). ↩
- Wikipedia(독일어판), “Johann Jakob Keller (Politiker)”(앞의 인용). SRF도 켈러를 “Bankvater”라고 부른다. SRF, “150 Jahre Zürcher Kantonalbank – ‘Die Bürger aus den Händen der Kapitalisten retten’”(앞의 인용). ↩
- Tages-Anzeiger, “Bernhardiner, Nashörner und ein Sachse”(앞의 인용). ↩
- NZZ, “150 Jahre Zürcher Kantonalbank: ZKB, Retterin vor ‘Kapitalisten’”(앞의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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