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약 전야의 경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추크는 번영하였지만 눈에 띄지는 않는 주(칸톤)였다. 추크의 주민 1인당 소득은 1890년 이래 스위스 평균을 웃돌았다. 1890년 그것은 854프랑으로 주들 가운데 5위였고, 이후 1910년 1,289프랑(6위), 1945년 3,132프랑(7위)으로 증가하였다.1 양차 대전 사이에 순위는 다소 하락하였다. 1930년 지주회사법은 아직 추크주의 경제에 가시적인 효과를 낳지 못하고 있었다.
등록된 회사의 수는 완만하게 증가하였다. 1913년 상업등기부에는 395개의 실체가 등재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245개는 개인사업체, 54개는 주식회사, 55개는 협동조합이었다. 1945년에는 850개가 등재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441개는 개인사업체, 171개는 주식회사, 130개는 협동조합이었다.2 전체 노동력 가운데 공장 노동자의 비율은 1911년 21.6%, 1929년 27.9%, 1949년 25.3%였다.3 1949년 최대 고용주는 약 2,000명의 종업원을 둔 Landis & Gyr였고, 금속제품 공장과 제지공장들은 각각 수백 명을 고용하였다.4
달리 말하면, 전후 시대에 들어선 추크주는 지주회사를 위한 소박한 조세 특례를 가진 산업 주였다. 추크주에는 비교적 높은 소득의 오랜 역사, 안정적인 보수 정부, 합의 지향적 정치 문화, 그리고 취리히와 루체른 사이라는 입지가 있었다. 추크주는 조세 경쟁을 시험해 보았지만, 그 시험은 아직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결정적인 전개는 1945년 이후 15년 동안에 이루어졌다.
양차 대전 사이 시기의 더 깊은 의의는 그 시기가 준비한 결정들에 있다. 추크주는 외부로부터 회사를 유치하기 위해 자신의 과세권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였다. 추크주는 그러한 회사들을 위해 국내 기업에 대한 통상적 과세와 구별되는 특별 제도를 만들었다. 추크주는 취리히 변호사들의 로비를 경험하였고, 그에 대응하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추크주는 자신의 선택이 가지는 도덕적·정치적 위험을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공개적으로 토론하였다. 전후 국제 경제가 회복되고 자본이 다시 안전하고 유리한 거처를 찾기 시작하였을 때, 추크주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석
- Zug in der Welt, “Zugs wirtschaftlicher Aufstieg seit 1815 – der Weg von einem armen zum finanzstärksten Kanton”, zuginderwelt.ch, 2026년 9월 확인: 명목 1인당 소득은 1890년 854프랑(5위), 1910년 1,289프랑(6위), 1945년 3,132프랑(7위)이었으며, 1890년부터 소득이 지속적으로 전국 평균을 웃돌았다. ↩
- Zug in der Welt, “Zugs wirtschaftlicher Aufstieg seit 1815”: 1913년 등록 회사 395개(개인사업체 245개, 주식회사 54개, 협동조합 55개); 1945년 850개(개인사업체 441개, 주식회사 171개, 협동조합 130개). ↩
- Zug in der Welt, “Zugs wirtschaftlicher Aufstieg seit 1815”: 전체 노동력 대비 공장 고용의 비율은 1911년 21.6%, 1929년 27.9%, 1949년 25.3%였다. ↩
- Zug in der Welt, “Zugs wirtschaftlicher Aufstieg seit 1815”: 1949년 Landis & Gyr가 약 2,000명의 종업원으로 선두였고, 금속제품 공장과 제지공장들은 각각 수백 명을 고용하였다; Zug in der Welt, “Zug und der globale Kapitalismus”: 1949년까지 Landis & Gyr는 현지에서 약 2,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추크주 최대의 고용주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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