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의 틀이 왜 중요했나
이 연방적 틀의 세 가지 특징이 결과를 형성하였다. 첫째, 어느 한 주권자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로카르노 주민들은 밀라노나 나폴리의 개신교도들처럼 한 가톨릭 군주의 처분에 맡겨져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 개혁파 관리의 보호 아래 있지도 않았다. 그들의 운명은 이후 250년 동안 로카르노를 함께 통치해야 하는 정부들 사이의 협상된 타협에 달려 있었다. 둘째, 종파 분쟁은 조약, 곧 란트프리덴(Landfrieden)의 해석을 둘러싼 분쟁으로 수행되었고, 분쟁 당사자들은 모두 그 조약을 존중한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연방은 최후의 수단인 중재 절차를 갖추고 있었다. 이 절차 덕분에 한쪽이 단순히 수적으로 다른 쪽을 압도하는 표결 없이도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어느 쪽도 정당하다고 여기지 않는 결정이었다. 가톨릭 주(칸톤)들에게 그것은 이단자들이 재산을 가지고 떠나도록 허용했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관대하였다. 취리히에게 그것은 이탈리아 대관구들 안의 유일한 개혁파 공동체를 끝냈다는 점에서 패배였다. 한 세기 뒤 슈비츠가 아르트(Arth)의 개혁파 주민들의 출국을 허용하지 않고 연방 중재에 응하기를 거부하자, 이 분쟁은 1656년 제1차 필메르겐 전쟁으로 이어졌다. 베흐톨트는 두 사례를 나란히 놓는다. 1555년에 로카르노의 개혁파는 아직 이주할 수 있었으나, 1655년에 아르트의 개혁파는 그럴 수 없었다.1 이 비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소박해 보이는 출국의 권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연방 절차의 산물이었으며,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
주석
- Bächtold, “Landfriedensbünde”(앞의 문헌) (“Während 1555 reformierte Locarneser noch auswandern konnten, führte der Streit um die Neubildung einer Gemeinde von Reformierten in Arth und die Weigerung von Schwyz, diese ziehen zu lassen bzw. sich einem eidgenössischen Rechtsverfahren zu stellen, im Jahr 1656 zum Ersten Villmergerkrie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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