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대사관과 보로메오 동맹
1579년 보로메오는 교황에게 연방 맹약자들 곁에 상설 교황대사관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로마 교황청이 주저하였기 때문에 루체른 교황대사관은 그가 사망한 지 2년 뒤인 1586년에야 설치되었다.1 내륙 5개 주(칸톤)가 이를 요청하였고, 가톨릭 측의 Vorort(수석주)인 루체른이 그 소재지가 되었다. 알트도르프(1725–1730)와 슈비츠(1835–1843)로의 일시적 이전을 제외하면, 교황대사관은 1873년의 관계 단절 때까지 루체른에 있었다. 교황대사관은 1920년 베른에 재설치되었다. 이 기간 내내 교황대사는 스위스 주재 교황청의 상주 대표였고, 교황 정책의 통로였으며, 스위스 교회에 관하여 로마에 보고하고 주교 선출과 임명에서 후보자의 적격성을 심사하는 관리였다.2
1586년 10월 5일 7개 가톨릭 주, 즉 루체른,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 프리부르, 졸로투른은 연방 안에서 가톨릭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루체른에서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들은 대외적·대내적 위험에 맞서 서로 지원할 것을 약속하였고, 그들 가운데 어느 곳에서든 가톨릭 신앙이 위협받을 경우의 개입권을 받아들였다. 이 동맹은 조약 문서의 금박 머리글자에서 이름을 따 Goldener Bund(황금동맹)라고 불렸다. 1610년 시성된 카를로 보로메오가 1655년 그 수호성인으로 선포되면서 동맹은 보로메오 동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펜첼 이너로덴이 1600년에, 글라루스의 가톨릭 측이 1655년에 가입하였다. 이 동맹은 1798년 구 연방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존속하였다.3 1년 뒤인 1587년, 밀라노 공국과 연방 맹약자들 사이의 오래된 협정들은 합스부르크 스페인과 가톨릭 주들 사이의 동맹으로 확대되었다. 졸로투른은 프랑스에 대한 의무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동맹은 스페인 왕실에 연금, 무역 특권, 곡물과 소금의 공급을 대가로 병사를 모집하고 군대를 통과시킬 권리를 부여하였다.4 따라서 종교 동맹과 군사·통상 동맹은 하나의 정책의 양면이었다. 뒤의 절에서 후자를 살펴본다.
주석
- Crivelli, “Borromeo, Carlo”(앞의 문헌): “nel 1579 B. chiese l'istituzione di una nunziatura permanente presso i Conf., che per le resistenze della curia romana venne tuttavia creata solo nel 1586”. ↩
- “Nuntiatur”, HLS, 2011년 11월 3일 판, https://hls-dhs-dss.ch/de/articles/011742/2011-11-03/(5개 주의 희망에 따른 1586년의 설치, 알트도르프 1725–1730, 슈비츠 1835–1843, 1873년의 관계 단절, 1920년 11월 8일부터 베른 주재 교황대사 루이지 말리오네, 교황대사의 기능). ↩
- Rudolf Bolzern, “Lega d'Oro”, DSS, 2005년 9월 9일 판, https://hls-dhs-dss.ch/it/articles/017187/; 독일어판, “Goldener Bund”, https://hls-dhs-dss.ch/de/articles/017187/(“so benannt nach dem vergoldeten Anfangsbuchstaben der Vertragsurkunden”, 보로메오가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1655년부터 Borromäischer Bund라는 명칭). ↩
- Fritz Glauser, “Mailänder Kapitulate”, HLS, 2011년 1월 13일 판, https://hls-dhs-dss.ch/de/articles/017199/2011-0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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