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공법: 기초자치단체, 십일조, 조세
헬베티아 공화국은 지방 행정을 프랑스식으로 개편하려 하였다. 옛 대관구에서는 comune가 종래의 vicinanza를 대체하였다. vicinanza는 공유지를 함께 이용하며 마을을 다스리던 가장들의 집회였다. 또한 새로운 지방자치 기관이 전통적인 consoli를 대신하였다. 공화국은 성직자에게 바치던 십일조를 폐지하고, 수도원 재산의 목록 작성을 명령하였으며, 공개 행렬을 금지하고 군사세를 부과하였다.1 공화국 전체 차원에서는 봉건적 부담을 폐지하고, 통일된 조세제도를 도입하였으며, 교회 재산의 일부를 세속화하였다.2 이들 조치는 하나하나가 대관구들이 연방의 지배 아래 3세기 동안 보존해 온 재산과 권위의 구조를 건드렸다. 십일조 폐지는 교구와 참사회의 수입을 빼앗았고, 수도원 재산 목록 작성은 수도원의 기본재산을 위협하였다. 한편 새로운 기초자치단체(게마인데)는 지방 재산의 관리를 옛 가문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기관의 손에 맡겼다.
정치적 기초자치단체와, 공유지 및 그에 딸린 권리를 보유한 옛 가문들의 단체가 분리된 것은 일반적으로 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본다. 티치노주에서 이 단체는 patriziato로 존속하였다. patriziato는 오늘날에도 주(칸톤)의 산림, 목초지, 건축용지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며 정치적 기초자치단체와 병존하는 공법상 단체이다.3 모든 주민으로 이루어진 기초자치단체와 옛 토지보유 가문들의 단체 사이의 구별은 토지 소유권, 사용권, 공유지 매각을 둘러싼 법적 문제의 끊임없는 원천이 되어 왔다. 계곡 지역 기초자치단체에서의 토지 취득에 관해 자문해 본 루가노의 변호사라면 누구나 이 문제에 부딪혀 보았다.
반응은 적대적이었다. 스위스 역사사전(DSS)의 벨린초나주 항목은 직접세, 의무 병역, 옛 공동체 구조의 해체를 민중 반발의 주된 원인으로 든다.4 마그데부르크 태생의 작가로서 헬베티아 공화국의 남부 담당 정부 감독관을 지낸 Heinrich Zschokke는 주민들의 태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였는데, 티치노의 역사가들은 지금도 이를 인용한다. “Il popolo è senz'altro per l'appartenenza alla Svizzera, ma non ama la costituzione dell'Elvetica”, 즉 민중은 분명 스위스에 속하기를 원하지만 헬베티아 헌법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5 스위스와의 결합과 스위스 국가의 형태를 구별한 것은 2월 15일의 군중이 liberi와 Svizzeri 사이에 그었던 구별과 같은 것이었다.
통합 시도, 피안 포브로, 헬베티아 주들의 종말
하나의 이탈리아어권 지역에 두 개의 주가 존재하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1801년 8월 10일 주 집회인 Dietina가 벨린초나에서 열려 두 주를 합병하고 공동의 수도를 정하려 하였다. 이 시도는 실패하였고, 1801년과 1802년의 추가적인 노력도 마찬가지였다. 루가노와 벨린초나의 엘리트들이 정부 소재지와 관직 배분에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6 이렇게 하여 1878년까지 티치노 정치를 사로잡게 될 수도를 둘러싼 경쟁은 주가 존재하기도 전에 시작되었다.
그동안 헬베티아 공화국 자체가 해체되어 갔다. 1800년부터 1802년 사이에 공화국은 단일주의자와 연방주의자가 주도권을 다투면서 네 차례의 쿠데타를 겪었다. 1802년 2월 새 헌법이 채택되었고, 이어 1802년 5월 20일 또 다른 헌법이 채택되었는데, 이것이 전국적인 연방주의자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7 남부에서 이 반발은 1802년 9월 피안 포브로 집회의 형태를 띠었다. 이 집회에서 pievi(옛 교회·행정 구역)의 대표들은 Giovan Battista Quadri의 지도 아래 국민주권을 선포하였다. Quadri는 1798년 libero-svizzeri 운동의 조직을 도왔던 인물이다.8 스위스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Stecklikrieg로 알려진 연방주의자의 봉기로 1802년 9월 헬베티아 정부가 붕괴하였다. 보나파르트는 1802년 9월 30일 생클루 포고로 이에 대응하여 스위스 각 정파에 자신의 중재를 강요하였다. 남부의 두 주는 헬베티아 공화국 자체와 함께 종말을 맞았다. 1803년 2월 19일의 중재법은 두 주를 해산하였고, 1803년 3월 10일 헬베티아 당국은 권한을 이양하였다.9
일자 사건 1797년 6월 29일 치살피나 공화국 선포 1798년 2월 15일 치살피나 측의 루가노 공격 격퇴; Liberi e Svizzeri 1798년 3월 14일 루가노 임시정부 선포 1798년 4월 12일 아라우에서 헬베티아 공화국 선포 1798년 4월 14일 루가노주와 벨린초나주 창설 1799년 4월 28–29일 루가노 폭동; Agnelli 인쇄소 약탈 9월 21–24일 수보로프 군대가 타베르네에서 고트하르트로 진군 1799년 1801년 8월 10일 벨린초나의 Dietina가 두 주의 통합을 시도 1802년 9월 피안 포브로 집회; Stecklikrieg 1803년 2월 19일 중재법; 티치노주 창설 1803년 5월 20일 벨린초나에서 Gran Consiglio 첫 회기
티치노는 헬베티아 시기를 주로 전쟁, 징발, 내분으로 기억하지만, 그 법적 유산은 상당하였다. 이 시기는 남부 주민들을 평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만들었고, 그들에게 성문 헌법과 선출된 대표를 처음으로 경험하게 하였다. 또한 대관구 제도의 수수료, 벌금, 통행세 대신 일반 조세로 재원을 조달하는 공공 재정이라는 관념을 도입하였다. 중재법이 티치노주를 창설하였을 때, 새 국가는 이러한 원칙 위에 서면서도 그것을 인기 없게 만들었던 중앙집권주의는 버릴 수 있었다.
주석
- “Periodo della Repubblica elvetica” (앞의 문헌). ↩
- Fankhauser, “Helvetische Republik” (앞의 문헌). ↩
- DSS, “Patriziato” 및 “Comune” 항목; 현행법에 관하여는 티치노주의 Legge organica patriziale. ↩
- Pauli Falconi (앞의 문헌). ↩
- “Periodo della Repubblica elvetica” (앞의 문헌); Zschokke의 역할에 관하여는 Negro (앞의 문헌). ↩
- “Periodo della Repubblica elvetica” (앞의 문헌); Negro (앞의 문헌). ↩
- Fankhauser, “Helvetische Republik” (앞의 문헌); “Periodo della Repubblica elvetica” (앞의 문헌). ↩
- “Periodo della Repubblica elvetica” (앞의 문헌); Negro (앞의 문헌); Stecklikrieg에 관하여는 Fankhauser, “Helvetische Republik” (앞의 문헌). ↩
- Andreas Fankhauser, “Mediazione”, in Dizionario storico della Svizzera (DSS), 2009년 10월 29일 판, https://hls-dhs-dss.ch/it/articles/009798/2009-10-29/; Negro (앞의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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