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치노주와 베른에서의 정치적 결과
주(칸톤) 각료의 사임
티치노에서 이 사건은 주(칸톤) 정부에까지 이르렀다. 기독민주국민당(PPD) 소속의 젊은 주정부 각료회의 위원 Fabio Vassalli는 1975년 같은 당 동료 Flavio Cotti와 함께 정부에 입각하였다. Vassalli는 Texon과 거래 관계가 있었는데, 사료는 이를 그 자체로 중대한 책임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으로 기술한다. 사건이 터지자 그는 어떠한 관여도 부인하였으나, 이후 연관성을 보여주는 문서가 유포되었다. 후대의 주(칸톤) 측 기술은 이 연관성을 경미하지만 실재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언론과 정치적 분위기의 압력 속에서 그는 사임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자신의 역할에 비해 과도한 압력에 굴복하였다고 주장하였다.1 영어권 문헌은 그의 사임 일자를 1977년 6월 19일로 적고 있다.2
이 사임은 또 다른 결과를 낳았다. PPD 명부에서 Vassalli의 다음 순위에 있던 후보들은 그중 일부가 금융 부문과 연관이 있었는데, 전반적인 의혹의 분위기 속에서 승계를 포기하였다. 그러자 당은 후보 명부에 없던 엔지니어이자 루가노 주립 인문계 고등학교(liceo) 교장인 Fulvio Caccia를 추천하였다. 바로 금융계와 연고가 없는 새로운 얼굴을 내세우기 위해서였다.3 이 일화는 변호사, 수탁업자, 정치인이 흔히 같은 집단에 속하던 주(칸톤)에서 정치와 은행업이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탈리아 자금에 기초한 20년간의 번영을 거친 티치노의 대중이 더 이상 그러한 유착을 의문 없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금융 분야에서 이해충돌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정치인들에게는 공정성과 완전한 투명성이 요구되었다.4
1977년 6월 22일 국민의회 토론
연방 차원에서 국민의회는 1977년 6월 22일 수요일 회기의 대부분을 키아소 사건에 할애하였다. 토론에서는 17건의 발언이 있었다. 연방평의회를 대표하여 연방재무부 장관 Georges-André Chevallaz는 정부가 이 스캔들로 인한 “vives préoccupations”를 공유한다고 말하고, 이를 “우리가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스위스의 사건”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은행 비밀유지가 외국 자금 유입의 주된 원인이라는 견해를 배척하고 일련의 조치를 발표하였다. 그것은 「은행법」의 개정, 은행들이 막 서명한 협약의 승인, 연방은행위원회(EBK)의 권한 강화, 형사 사건에 관한 국제사법공조에 관한 새로운 법률, 그리고 특별 감사기관에 관한 검토였다.5
원내 교섭단체들은 이 토론을 각자의 입장을 밝히는 데 활용하였다. 사회민주당을 대표하여 취리히 출신 국민의회 의원 Uchtenhagen은 은행에 대한 통제 강화를 요구하고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 강화를 위한 동의안(motion)을 제출하였다. 국민의회는 이를 보다 약한 형태인 요청안(postulate)으로 86 대 56으로 채택하였다. 무소속연맹(Landesring der Unabhängigen)을 대표하여 역시 취리히 출신인 König는 스위스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한 완전한 진상 규명을 촉구하면서도, 범죄는 억제할 수는 있으나 결코 완전히 방지할 수는 없다고 인정하였다.6 이 토론은 이후 7년간의 정치적 논쟁의 틀을 정하였다. 좌파는 키아소 사건을 은행 비밀유지와 대형 은행의 권력에 헌법적 제한이 필요하다는 증거로 본 반면, 중도와 우파는 이를 자율규제와 감독 개선으로 대처할 수 있는 형사 사건으로 보았다.
주석
- Ente Ticinese per il Turismo, “Lo ‘scandalo’ di Chiasso”(앞의 글): Vassalli는 1975년 같은 당 동료 Flavio Cotti와 함께 정부에 입각하였다. 그는 Texon과 관계가 있었으나 이를 부인하였고, 그의 관여를 입증하는 문서(“non rilevante ma reale”)에 의해 반박되자 사임하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과도한 압력에 굴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
- 영어판 Wikipedia, “Chiasso scandal”, https://en.wikipedia.org/wiki/Chiasso_scandal(1977년 6월 19일이라는 일자에 관하여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 일자는 해당 문서에서 scriptorium.ch 기록보관소의 당시 신문 보도에 근거하고 있다). ↩
- Ente Ticinese per il Turismo, “Lo ‘scandalo’ di Chiasso”(앞의 글): PPD 명부의 다음 순위 후보들은 포기하였고, “il giovane direttore del liceo di Lugano, l'ingegner Fulvio Caccia, che non era nella lista dei candidati”가 “per dare un'immagine nuova, estranea al mondo dell'economia e della finanza” 정부에 기용되었다. ↩
- Ente Ticinese per il Turismo(앞의 글)(“Si chiedono correttezza e trasparenza assolute ai politici che potrebbero avere qualche collusione o conflitti di interesse nel ramo finanziario”). ↩
- “L'affaire du Crédit Suisse au Conseil national”, La Liberté(프리부르), 1977년 6월 22/23일, https://doc.rero.ch/record/282825/files/1977-06-23.pdf(“17 interventions”; “ministre des finances”로서의 Georges-André Chevallaz; “Le Conseil fédéral révisera la loi sur les banques”; “projet de loi sur l'entraide judiciaire internationale en matière pénale”). ↩
- La Liberté, 1977년 6월 22/23일(앞의 글)(Uchtenhagen 의원의 동의안이 86 대 56으로 요청안으로서 채택됨; König 의원의 발언; 두 사람 모두 취리히 의원으로 표시됨, “soc/ZH” 및 “ind.-Z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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