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지 않은 규모
양차 대전 사이 시기에 티치노주(칸톤)로 유입된 이탈리아 자본의 규모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Banca della Svizzera Italiana의 대차대조표 총액은 1914년에 약 8,830만 스위스 프랑이었고, 1950년에도 1억 220만 스위스 프랑에 불과하였다.1 두 차례 전쟁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실질 기준으로 보면, 이 은행은 36년 동안 거의 성장하지 못한 셈이다. 1935년 이 은행은 티치노주의 은행 가운데 처음으로 취리히에 지점을 열었다. 이는 루가노의 은행가들이 남쪽의 이탈리아뿐 아니라 북쪽의 스위스 자본시장에도 눈을 돌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2 루가노 기초자치단체(게마인데)의 인구는 1910년 14,988명에서 1930년 17,672명, 1950년 21,448명으로 늘었다.3 이 수치는 은행 부문이 작은 지방 소도시의 모습을 보여 준다. 스위스 역사사전에 따르면 루가노 금융 중심지의 폭발적 성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야 이탈리아로부터의 대규모 자본 유입에 힘입어 시작되었다.4
양차 대전 사이의 자본 유입 규모가 크지 않았던 이유는 국경 양쪽 모두에 있다. 이탈리아 쪽에서는 1927년 이후 리라화가 높은 평가로 안정되면서 몇 년 동안 통화를 피해 자본을 빼돌릴 유인이 줄었고, 동시에 파시스트 정권의 경찰 및 외환 통제로 자금 이동의 위험이 커졌다. 스위스 쪽에서는 티치노주의 은행들이 아직 1914년의 손실에서 회복하는 중이었다. 대형 은행들은 이탈리아 관련 업무를 주로 본점과 취리히·제네바 지점을 통해 처리하였다. Guex가 서술하는 양차 대전 사이의 대규모 국제 자본 흐름은 프랑스, 독일, 중부 유럽에서 취리히, 바젤, 제네바로 향하였다. 루가노의 시대는 그 이후에 왔다.
불만과 키아소 자유항
양차 대전 사이 티치노주의 경제적 처지는 취약하였고, 티치노주 스스로도 이를 공언하였다. 1924년 주정부는 연방에 일련의 요구 사항을 제출하였는데, 이는 Rivendicazioni ticinesi로 알려지게 되었다. 1925년 공식 문서로 발표된 이 요구는 연방철도가 고트하르트 노선에 부과하던 산악 할증요금의 폐지, 레벤티나 지역 수력 발전에 대한 통제권의 회복, 농업에 대한 연방 보조금, 티치노 시민을 위한 연방 직위의 확대, 그리고 주 내 독일어 학교의 폐쇄를 요구하였다.5 이 요구는 1938년과 1946년에 Nuove Rivendicazioni로 다시 제기되었다. 스위스 역사사전은 티치노 사람들이 요구한 것의 상당 부분을 얻어 냈으나, 티치노주는 경제적으로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렀다고 결론짓는다.6 경제적·문화적 요구에 따라 연방은 티치노주의 이탈리아적 성격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채택하였다. 1931년부터 연방 보조금이 이탈리아어권 지역의 교육을 지원하였고, 1942년에는 이탈리아어 및 이탈리아 문화를 위한 연방 보조금이 다섯 배로 늘었다.7 또 하나의 경제정책 수단이 키아소에 등장하였다. 국경 도시 키아소는 1874년 루가노 방면, 1876년 코모 방면 노선이 개통된 뒤 건설된 국제역 덕분에 성장한 도시로, 1925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자유항을 얻었다.8 자유항에서는 물품을 수입하거나 재수출할 때까지 스위스 관세를 납부하지 않고 보관하고 취급할 수 있었다. 자유항은 키아소의 운송대리인(spedizionieri)들의 사업을 강화하였다. 이들은 이탈리아와 스위스 사이의 통과 운송 서류를 처리하였고, 이후 수십 년 동안은 국경을 넘는 물품과 현금의 덜 공식적인 이동도 다루었다. 키아소의 인구는 1910년 5,722명, 1950년 5,744명으로 이 시기에 거의 변하지 않았으나, 티치노주의 세관 관문으로서의 역할은 확고히 자리 잡았다.9
수치로 본 개관. Banca della Svizzera Italiana의 대차대조표 총액은 1914년 약 8,830만 스위스 프랑에서 1950년 1억 220만 스위스 프랑으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10 루가노의 인구는 1910년 14,988명, 1930년 17,672명, 1950년 21,448명이었다.11 1913년부터 1929년 사이에 스위스 은행들의 총자산은 프랑스 은행들 총자산의 26%에서 73%로 증가하였다.12 이 수치들은 양차 대전 사이의 시기가 루가노에 제도적 토대를 마련하였고, 대규모 자본 흐름은 1945년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났음을 보여 준다.
주석
- Gian Franco Pordenone, “Banque de la Suisse italienne (BSI)”,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Suisse (DHS) 수록, 2019년 10월 24일 판, https://hls-dhs-dss.ch/fr/articles/041947/ (“88'254 en 1914, 102'224 en 1950”, 단위 1,000 프랑). ↩
- Pordenone, “Banque de la Suisse italienne (BSI)” (앞의 글): “le premier établissement tessinois à ouvrir en 1935 une filiale à Zurich”. ↩
- Negro, “Lugano (Gemeinde)” (앞의 글). ↩
- Negro, “Lugano (Gemeinde)” (앞의 글): “Nach dem Zweiten Weltkrieg, vor allem seit den 1960er Jahren, ist der Banken- und Finanzdienstleistungssektor in Lugano dank massivem Kapitalzufluss aus Italien explosionsartig gewachsen.” ↩
- Silvano Gilardoni, “Rivendicazioni ticinesi”, Historisches Lexikon der Schweiz (HLS) 수록, 2012년 2월 10일 판, https://hls-dhs-dss.ch/de/articles/026986/. ↩
- Gilardoni, “Rivendicazioni ticinesi” (앞의 글). ↩
- Silvano Gilardoni 및 Sacha Zala, “Svizzera italiana”, HLS 수록, 2014년 3월 11일 판, https://hls-dhs-dss.ch/de/articles/017442/2014-03-11/. ↩
- Stefania Bianchi, “Chiasso”, DHS 수록, 2022년 6월 30일 판, https://hls-dhs-dss.ch/fr/articles/002230/. ↩
- Bianchi, “Chiasso” (앞의 글). ↩
- Pordenone, “Banque de la Suisse italienne (BSI)” (앞의 글). ↩
- Negro, “Lugano (Gemeinde)” (앞의 글). ↩
- Guex, “Piazza finanziaria” (앞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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