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5년 이후의 로카르노: 상실, 기억, 개혁파의 귀환
1555년의 출국은 로카르노에서 지배 주(칸톤)들이 안고 있던 신앙고백상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그 해결에는 도시가 떠안아야 할 대가가 따랐다. 스위스 역사사전은 16세기에 로카르노의 인구가 종교적 망명과 1576년 및 1577년의 페스트로 크게 감소하였고, 17세기에 이르러서야 회복되었다고 기록한다.1 이 출국으로 작은 도시는 여러 주요 가문과 다수의 의사, 법률가, 상인, 그리고 그들이 현금화할 수 있었던 자본을 잃었다. 20년 뒤의 페스트는, 밀라노 교구에서 카를로 보로메오가 행한 사목 방문과 자선 조치로 유명해진 것으로서, 이미 약해진 도시를 강타하였다.2
로카르노가 치른 경제적 대가
경제적 손실은 측정하기 어렵다. 이주자들과 함께 빠져나간 자본이나 그들이 매각한 재산의 가치에 관한 수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성격은 분명하다. 이주자들은 동산(動産)적 부와 상업적 인맥을 보유하고 이를 새로운 환경에서 활용할 수 있었던 계층에 속하였다. 남은 이들은 대체로 그 부가 토지와 지방 관직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었다. 호수를 따라 이루어지는 교역과 롬바르디아와 알프스 고개들 사이의 통과 교통에 번영을 의존하던 도시에서, 취리히, 바젤, 그라우뷘덴주에 인맥을 가진 상인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떠나자 도시의 상업적 영향 범위는 한 세대 동안 축소되었다. 티치노의 작가 피에로 비안코니는 훗날 그 뒤 몇 세기 동안의 로카르노를 “come di una cosa morta e triste, senza quella tragica grandezza delle città sbagliate”(실패한 도시들이 지닌 비극적 장엄함도 없는, 죽은 듯하고 슬픈 무엇과 같은) 곳으로 묘사하였다. 이 평가는 2005년 망명 450주년을 기념한 책에 인용되었다.3
로카르노가 잃은 것을 취리히가 얻었다. 제B.II장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로카르노 가문들은 이후 두 세기에 걸쳐 취리히의 견직 산업과 교역, 그리고 마침내 은행업과 출판업에서 주도적 인물이 되었다. 2026년 5월 취리히 시정부의 로카르노 방문에 관한 오늘날의 한 신문 보도는, 지역 역사가들이 여러 형태로 되풀이해 온 한 문장으로 이 사건을 요약하였다. 독일어권 스위스의 도시에게는 아마도 기회였겠지만, 로카르노에게는 분명 큰 손실이었다는 것이다.4
취리히와 로카르노의 기억
이 망명은 취리히 개혁파 정체성의 건국 서사가 되었다. 1655년의 한 그림은 이 이주를 기념하였다.5 가문의 역사들이 그 기억을 이어 갔으며, 그 가운데에는 잘로몬 폰 오렐리가 1797년에 저술한 500쪽이 넘는 알로이시오 오렐리의 이상화된 전기가 있다.6 스위스 역사사전은 이 망명이 스위스 개혁파의 정체성을 형성하였고 그 주인공들을 신앙과 희생의 모범으로 만들었으며, 특히 바르바라 무랄토의 역할이 17세기 이후 강조되었다고 지적한다.7 1836년 페르디난트 마이어의 역사서는 이 이야기에 학술적 형태를 부여하였다. 2005년의 이탈리아어 번역은 망명자들이 떠나온 지역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접할 수 있게 하였다.8
로카르노에서는 이 사건이 오랫동안 덜 주목받았다. 제B.III장에서 다루는 이후 수십 년간의 가톨릭 개혁은 이 도시와 대관구를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티치노 역사가들의 연구와 2005년의 기념 출판물을 통해 지역사의 일부로 되살아났다.9 오늘날 이 도시는 망명을 자신의 역사의 한 장으로 제시한다. 2026년 5월 로카르노 시정부는 새로 선출된 취리히시 정부를 팔라초 마르카치에서 맞이하였다. 지역 언론은 이 자리를 1555년, 그리고 1925년의 로카르노 조약과 연결하였는데, 로카르노는 이 조약을 대화와 평화적 해결의 전통의 일부로 여긴다.10
개혁파의 티치노 귀환
프로테스탄트 예배는 망명 후 3세기 만에 티치노로 돌아왔다. 최초의 개혁파 공동체들은 1860년 무렵부터 형성되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철도와 관광을 따라 남쪽으로 온 독일어권 스위스인들이 세운 공동체들이 있었다. 1885년 비아스카에 파올로 칼비노 목사의 주도로 복음주의 교회와 학교가 세워졌다.11 1848년의 「연방헌법」은 기독교 신앙고백에 속한 스위스 시민들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1874년의 개정 「연방헌법」은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확대하였고, 이로써 개혁파 스위스인들은 티치노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신앙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12 주 헌법에서 개혁교회와 가톨릭교회 사이의 법적 평등은 1975년의 헌법 개혁에 이르러서야 실현되었다.
1997년 12월 14일의 현행 「티치노주 헌법」은 제24조에서 가톨릭교회와 복음주의 개혁교회 양자에게 공법상의 법인격을 부여한다. 각 교회와의 관계는 별도의 법률로 규율된다. 1997년 4월 14일의 Legge sulla Chiesa evangelica riformata nel Cantone Ticino와 2002년 12월 16일의 Legge sulla Chiesa cattolica이다.13 2025년 로카르노 시정부는 교회와 국가의 보다 명확한 분리를 요구하는 시의회 동의(動議)에 대한 답변에서 이 법적 틀을 직접 설명하였다. 추방으로부터 4세기 반이 지난 지금, 12개 주가 로카르노에서 용인하지 않았던 신앙고백의 후예들은 로카르노가 속한 주에서 가톨릭교회와 동일한 공법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주석
- Janke and Huber, “Locarno (comune)”(앞의 주). ↩
- Janke and Huber, “Locarno (comune)”(앞의 주)(망명과 1576–1577년의 페스트로 인한 16세기의 인구 감소); “Charles Borromeo”, Wikipedia(영어판),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Borromeo (보로메오는 1576년 페스트 기간 동안 밀라노에 머물며 구호 활동을 조직함). 접근 가능한 학술 자료가 없어 이를 이용하였다. 제B.III장 및 Ceschi (ed.), Storia della Svizzera italiana dal Cinquecento al Settecento(앞의 주)도 참조. ↩
- Simona Canevascini and Piero Bianconi, L’esilio dei protestanti locarnesi, introduction by Rodolfo Huber (Locarno: Armando Dadò, 2005)에 대한 서평, Scuola ticinese 제271호, https://m4.ti.ch/fileadmin/DECS/DS/Rivista_scuola_ticinese/ST_n.271/ ST_271_esilio_dei_protestanti_locarnesi.pdf. ↩
- “Il Municipio di Zurigo ospite a Locarno”, Ticinonline, 2026년 5월 22일, https://www.tio.ch/ticino/attualita/1927373/il-municipio-di-zurigo-ospite-a-locarno (“Forse un’opportunità per la città della Svizzera tedesca, ma sicuramente una grande perdita per Locarno”). ↩
- Tosato-Rigo, “Protestantische Glaubensflüchtlinge”(앞의 주). ↩
- “Aloisio Orelli”, Wikipedia(영어판)(앞의 주)(잘로몬 폰 오렐리의 전기, 1797년). 접근 가능한 학술 자료가 없어 이를 이용하였다; Illi, “Orelli, Aloisio”(앞의 주); Hans Schulthess, Die von Orelli von Locarno und Zürich (Zurich 1941). ↩
- Nicoli, “Muralto, Barbara”(앞의 주). ↩
- Meyer, La comunità riformata di Locarno (2005)(앞의 주). ↩
- Scuola ticinese 제271호의 서평(앞의 주); Emidio Campi, Brigitte Schwarz and Paolo Tognina (eds), Ticino e protestanti (Locarno: Armando Dadò, 2004), Daniele Campoli의 서평, Scuola ticinese 제266호, https://m4.ti.ch/fileadmin/DECS/DS/Rivista_scuola_ticinese/ST_n.266/ ST_266_Campoli_Ticino_e_protestanti.pdf. ↩
- “Il Municipio di Zurigo ospite a Locarno”(앞의 주)(2026년 5월 14일 팔라초 마르카치 방문). ↩
- Campoli, Ticino e protestanti에 대한 서평(앞의 주). 독일어권 스위스 정착민과 철도의 역할. ↩
- Municipio di Locarno, Preavviso sul contenuto della mozione Cavalli “Per una chiara divisione tra Stato e Chiesa”, 2025년 3월 13일, https://www.locarno.ch/files/documenti/Preavviso_contenuto_mozione_Cavalli__per_una_ch iara_divisione_tra_stato_e_chiesa.pdf (1848년과 거주 이전의 자유). 1848년 9월 12일의 「연방헌법」 제41조(거주 이전은 기독교 신앙고백에 속한 스위스인에 한정됨), 1866년 유대인 스위스인으로의 확대, 그리고 1874년 5월 29일의 「연방헌법」 제49조 및 제50조. ↩
- Municipio di Locarno, Preavviso(앞의 주)(주 헌법 제24조는 “conferisce personalità di diritto pubblico alle due principali Chiese, quella Cattolica e quella Evangelica Riformata”; 두 법률의 날짜). 주 헌법의 날짜(1997년 12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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