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통일과 에셔의 입장 전환
1860년대 초의 두 사건이 이 문제를 결정지었다. 첫째는 이탈리아의 통일이었다. 롬바르디아가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는 한 피에몬테는 오스트리아 영토를 피하는 경로에 이해관계가 있었고, 이는 루크마니어에 유리하였다. 1859년 이후, 그리고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된 이후, 새 국가는 포강 평야 전체를 장악하였고 밀라노와 제노바를 북유럽과 가장 잘 연결하는 경로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티치노 철도 문제를 다룬 한 역사가는 이탈리아 통일을 이 논쟁에서의 “유익한 격변”이라고 표현하였다.1 콜러와 베틀리는 그곳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토리노로 갔다. 고트하르트 위원회의 역사에 따르면, 이탈리아 측은 지지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내걸었다. 정확한 건설 계획, 확실한 스위스 측 공동 재원 조달, 그리고 상당한 액수의 보증금이었다.2 1865년과 1866년 이탈리아 정부는 스테파노 야치니(Stefano Jacini) 장관이 이끄는 위원회로 하여금 대안들을 검토하게 하였다. 최종 표결에서 고트하르트는 8표, 슈플뤼겐은 3표를 얻었고 루크마니어는 한 표도 얻지 못하였다. 1866년 2월 이탈리아 정부는 고트하르트만을 지지하기로 약속하였다.3
둘째 사건은 알프레트 에셔(Alfred Escher)의 입장 전환이었다. 노르트오스트반의 사장으로서 에셔는 처음에는 취리히 노선망에 교통을 공급할 동부 알프스 경로를 선호하였다. 1860년대 초 그는 오직 고트하르트만이 이탈리아와 독일 국가들의 보조금을 끌어들일 수 있으며, 루체른과 추크를 경유하는 중앙 경로 역시 취리히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863년 8월 7일 고트하르트 위원회는 고트하르트 협회(Gotthardvereinigung)로 재편되었고, 이제 15개 주(칸톤)와 양대 철도회사인 노르트오스트반(NOB)과 첸트랄반(SCB)을 아우르게 되었다. 에셔는 협회의 회장이 되어 사업의 추진력이 되었다.4 루체른의 정치인 요제프 칭(Josef Zingg)은 협회에서 그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였고, 이후 회사의 부회장이 되었다.5 에셔의 전향은 취리히의 금융력을 중앙 경로의 지리적 논리와 결합시켰다. 이는 또한 이 사업에 스위스 최대의 철도회사와 스위스 최대의 상업은행을 동시에 지배하는 지도자를 안겨 주었다. 이러한 역할의 집중은 훗날 그의 몰락에 일조하였다.
경로들 사이에 선 티치노
티치노주의 입장은 훗날의 고트하르트 찬미가 시사하는 것보다 복잡하였다. 이 주는 거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철도를 원하였지만, 지역마다 이해관계가 달랐다. 벨린초나, 로카르노, 블레니오 계곡을 포함하는 소프라체네리는 루크마니어든 고트하르트든 어느 쪽에서도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두 노선 모두 비아스카와 벨린초나로 내려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루가노와 멘드리시오를 포함하는 소토체네리는 몬테체네리를 넘거나 관통하여 루가노와 키아소에 이르는 노선에 의존하였는데, 이 노선을 확실하게 포함한 것은 고트하르트 계획뿐이었다. 그리하여 1861년부터 1869년 사이 대평의회는 여러 추진자에게 차례로 부설권을 부여하였다. 1861년 대평의회는 영국인 추진자 R. G. 실라(R. G. Sillar)에게 주 내부 노선에 대한 부설권을 승인하였는데, 여기에는 루크마니어와 고트하르트 모두에 대한 우선권이 포함되었다. 1864년 12월 실라는 이 권리를 European Central Railway Company에 양도하였다. 1866년 가을 대평의회는 루체른 위원회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 대신 영국 외교관 제임스 허드슨(Sir James Hudson) 경과 티치노 출신 제나치니(Genazzini)의 그룹과 90만 스위스 프랑의 보증금으로 담보된 협약을 받아들였으며, 제네바의 은행 Hentsch & Cie에 루크마니어 부설권을 부여하였다.6
이 부설권들 가운데 어느 것도 건설로 이어지지 않았다. 1868년 여름 대평의회는 두 개의 지역 노선, 즉 라비차리(Lavizzari)와 프라스키나(Fraschina) 그룹의 키아소–루가노선과 로카르노 그룹의 로카르노–비아스카선을 승인하고, 각각에 100만 스위스 프랑의 보조금을 약속하였다. 1869년 5월 15일 대평의회는 모든 철도 특권을 루체른의 고트하르트 위원회에 양도하였다. 고트하르트 사업에 대한 티치노주의 보조금 총액은 최종적으로 300만 스위스 프랑에 달하였는데, 이는 연방에서 가장 가난한 주 가운데 하나로서는 큰 금액이었다. 한 동시대인은 이 주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주었다고 썼다.7 카스타뇰라에서 망명 생활을 한 롬바르디아의 연방주의자 카를로 카타네오(Carlo Cattaneo)(제C.II장)는 고트하르트를 위해 글로써 운동을 벌였고, 야치니 보고서를 번역하여 중앙 경로를 지지하는 공개적 논거로 삼았다. 그는 이 문제를 결정한 회의를 몇 달 앞둔 1869년 2월에 사망하였다.8
흔한 오해. 고트하르트 철도는 흔히 스위스가 스스로 내린 당연한 선택으로 제시된다. 사료는 세 경로 사이의 오랜 경쟁을 보여 주며, 그 경쟁은 스위스의 계획보다는 외국 국가들의 자금에 의해 결정되었다. 루크마니어는 동부의 주들, 피에몬테, 그리고 처음에는 티치노주의 지지를 받았다. 고트하르트가 승리한 것은 이탈리아 통일 이후 이탈리아 정부가 1866년 이를 선택하고 가장 큰 보조금을 제시한 뒤였으며, 또한 1863년 알프레트 에셔가 노르트오스트반과 취리히의 자본을 중앙 경로로 끌어온 뒤였다. 티치노주 자신도 1869년까지 두 경로 모두에 대해 부설권을 부여하였다.
주석
- Bruno Caizzi, “La fine di una tormentata vicenda ferroviaria e la vittoria del San Gottardo”, Scuola ticinese 제102호, https://m4.ti.ch/fileadmin/DECS/DS/Rivista_scuola_ticinese/ST_n.102/ ST_102_Caizzi_fine_tormentata_vicenda_ferroviaria_e_vittoria_del_San_Gottardo.pdf: “l’unificazione italiana avrebbe provocato un benefico sconvolgimento”. 제목은 온라인판 파일명에 나타난 대로 표기하였다. ↩
- Meister, Geschichte des Gotthard-Komitees(앞의 주), 콜러와 베틀리의 토리노 방문과 그곳에서 제시된 세 가지 조건에 관하여. Meister는 이 조건들을 카보우르에게 돌리지만, 방문 시점은 카보우르가 사망한 1861년 6월 6일 이후인 1862년으로 기록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장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
- Caizzi, “La fine di una tormentata vicenda”(앞의 주), 1865–1866년의 야치니 조사(고트하르트 8표, 슈플뤼겐 3표, 루크마니어 0표)와 1866년 2월 이탈리아의 약속에 관하여. ↩
- Meister, Geschichte des Gotthard-Komitees(앞의 주), 1863년 8월 7일의 재편, 15개 주, NOB와 SCB, 그리고 에셔의 전향에 관하여; 스위스 역사사전(HLS), 항목 “Gottardo, Ferrovia del”(Hans-Peter Bärtschi, 이탈리아어 번역 Sandro Guzzi-Heeb, 2007년 1월 9일 판), https://hls-dhs-dss.ch/it/articles/042006/, 1863년 에셔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결합에 관하여; HLS, 항목 “Escher, Alfred”(앞의 주), 1863년부터 그가 협회 회장을 맡은 것에 관하여. ↩
- Verkehrshaus der Schweiz, 소장품 데이터베이스, 항목 “Gotthard-Vereinigung (Grosse Gotthardvereinigung)”, https://sammlung.verkehrshaus.ch/de/artists/artist/20112, Josef Zingg-Kopp(1828–1891)를 거명; H. Etter, “Vom Bau der Gotthardbahn und den Männern, die dabei waren”, Schweizer Illustrierte Zeitung 제20호, 스위스 국립도서관 e-dossier, https://www.nb.admin.ch/dam/snl/fr/dokumente/vermitteln/e-dossier/ h_ans_etter_vom_baudergotthardbahnunddenmaennerndiedabeiwarenins.pdf.download.pdf/ h_ans_etter_vom_baudergotthardbahnunddenmaennerndiedabeiwarenins.pdf, J. Zingg를 부회장으로 거명. ↩
- Caizzi, “La fine di una tormentata vicenda”(앞의 주), 1861년의 실라 부설권, 1864년 12월의 양도, 90만 스위스 프랑의 보증금을 수반한 허드슨–제나치니 협약, 그리고 1866년 가을 Hentsch & Co.에 부여된 루크마니어 부설권에 관하여. ↩
- Caizzi, “La fine di una tormentata vicenda”(앞의 주), 1868년 여름에 승인된 지역 노선, 각 100만 스위스 프랑의 보조금, 1869년 5월 15일의 양도, 그리고 300만 스위스 프랑에 이르는 주 보조금 총액에 관하여(“tutto quello che poteva dare”). ↩
- Caizzi, “La fine di una tormentata vicenda”(앞의 주), 고트하르트를 위한 카타네오의 호소와 야치니 보고서 번역에 관하여; Treccani, Enciclopedia italiana, 항목 “Cattaneo, Carlo”, https://www.treccani.it/enciclopedia/carlo-cattaneo/ (“Castagnola, Lugano, 1869”에서 사망); 위키백과(이탈리아어), “Carlo Cattaneo”, https://it.wikipedia.org/wiki/Carlo_Cattaneo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 1869년 2월 6일이라는 날짜에 관하여. 제C.II장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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