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평의회 위원이자 연방의 통계학자
1848년 프란시니는 새로 구성된 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48년 11월 16일 연방의회는 3차 투표에서 132표 중 68표로 그를 제1기 연방평의회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내무부를 이끌었다. 그 직책에서 남긴 가장 오래가는 업적은 1850년 제1차 연방 인구조사였다. 주(칸톤) 통계청은 이를 “uomo della statistica e uomo di governo”, 즉 통계의 사람이자 통치의 사람이었던 프란시니의 마지막 위대한 작업으로 묘사한다. 185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는 Materiali per la statistica della Svizzera의 여러 권을 펴냈다.1 그는 연방 공과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였고, 이 학교는 1855년 취리히에서 오늘날의 ETH로 문을 열었다. 반면 연방 대학교 설립 제안은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2 프란시니는 1857년 7월 19일 베른에서 사망하였다. 연방통계청은 그를 “스위스 통계의 아버지”로 여기며, 그가 사망 3년 뒤인 1860년의 연방통계청 설립에 기여하였다고 기록한다.3 그의 마지막 정치적 글인 1854년의 Semplici verità ai Ticinesi는 정치적 갈등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자신의 주를 향해 쓴 것이었다.
통계, 교육, 신뢰
프란시니의 업적은 간과하기 쉬운 방식으로 금융 중심지와 관련된다. 금융 중심지는 신뢰할 수 있는 공공 정보에 의존한다. 인구 및 고용 데이터, 조세 통계, 토지 가격, 물가지수, 그리고 은행, 투자자, 감독 당국이 의사결정의 근거로 삼는 경제 데이터가 그것이다. 티치노주 통계청(Ufficio di statistica del Cantone Ticino, USTAT)과 연방통계청은 프란시니가 시작한 전통을 잇고 있다. 은행, 대차대조표, 국경 간 포지션에 관한 스위스 국립은행(SNB)의 통계도 같은 계열의 공공재에 속한다. 교육은 그가 남긴 유산의 나머지 절반이다. 20세기 루가노의 은행가, 신탁업자, 변호사들은 그가 조직한 주립 학교들에서 배출되었다. 1852년부터 카를로 카타네오가 가르친 루가노 주립 리체오(Liceo cantonale)는 제C.II장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주의 전문직 엘리트를 길러 내는 곳이 되었다.4 티치노에 자체 대학교가 생긴 것은 1996년 스위스 이탈리아어권 대학교(Università della Svizzera italiana)가 설립되면서였으며, 그 경제학부와 금융연구소는 제I.III장에서 다룬다.
주석
- Bottinelli·Zanetti(앞의 글). ↩
- Marcacci(앞의 글); Marazzi, Lacaita에 대한 서평(앞의 글). ↩
- 연방통계청, “History of the FSO”, https://www.bfs.admin.ch/bfs/en/home/bfs/geschichte.html; Marcacci(앞의 글). ↩
- Carlo Moos, “Cattaneo, Carlo”, 스위스 역사 사전(DSS), 2005년 2월 1일 판, https://hls-dhs-dss.ch/it/articles/010128/ (카타네오는 1852년부터 루가노 주립 리체오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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