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젤리스타 차니노와 최초의 매뉴팩처
로카르노 출신 기업가 가운데 가장 야심찬 인물은 Evangelista Zanino였다. 1530년경 로카르노에서 태어난 그는 1567년 취리히 시민이 되었고 1603년 그 도시에서 사망하였다. 다른 난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취리히와 북이탈리아 사이의 수출입 무역으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Historisches Lexikon der Schweiz는 그를 로카르노 사람들 가운데 길드가 부과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무역에서 생산으로 옮겨 간 유일한 인물로 서술한다. 그는 1558년 공단 직조를, 1565년에는 면과 리넨을 섞은 직물인 Mailänder Barchent(밀라노 퍼스티언, 프랑스어 basin de Milan) 생산을 시작하였다.1 Zanino는 사프란 길드의 구성원이었다. 그는 취리히 시의회의 대출로 자신의 염색 공장을 세우고, 퍼스티언 생산을 위해 북이탈리아 출신 노동자들을 고용하였다.
같은 사료에 따르면 Zanino의 사업체는 독일어권 스위스 최초의 대규모 산업 기업이었다. 그것은 집중화된 매뉴팩처와, 후에 Verlagssystem(선대제)으로 알려진 방적공·직조공의 가내 작업을 결합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자본 부족과 투기로 인해 실패하였다.2 Zanino의 실패는 Orelli 가문의 성공만큼이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로카르노 사람들의 기술적 지식과 신용을 제공하려는 시의회의 의지만으로는 좁은 자본 기반, 변동성이 큰 시장, 길드의 적대라는 복합적 위험에 맞서 매뉴팩처를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다음 세대의 성공한 가문들은 이러한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다. 그들은 가내 작업에 의존하고 고정 투자를 작게 유지하였으며, 수십 년에 걸쳐 자본을 축적한 뒤에야 더 큰 시설에 투자하였다.
핵심 정리. 첫 세대 로카르노 상인들은 롬바르디아와의 무역으로 생계를 이었다. Aloisio Orelli는 1557년부터 일용품을, 1558년부터 견직물과 벨벳을 팔았다. 그의 아들들은 모직물과 면직물을 대규모로 거래하였다. Evangelista Zanino는 제조업으로 옮겨 간 유일한 로카르노 사람으로, 1558년부터 공단 직조를, 1565년부터 밀라노 퍼스티언 생산을 하였으며, 그 자금의 일부는 시의회의 대출로 조달되었다. 독일어권 스위스 최초의 대규모 산업 기업이었던 그의 매뉴팩처는 자본 부족으로 실패하였다.
벨벳 직조공과 견직 노동자
로카르노 거류지에는 특정한 기술을 가져온 장인들도 있었다. 딸 Elisabeth가 견직물 제조업자 Johannes Muralt와 혼인한 Cornelius Thoma는 벨벳 직조공이었다.3 벨벳 직조에는 특수한 직기, 숙련된 노동자, 그리고 1555년 이전의 취리히에는 없던 파일 절단 기술이 필요하였다. 새 이주자들을 새로운 업종으로 유도한 시의회의 정책은 이러한 수공업에 유리하였다. 이들 업종은 기존 길드 장인들과 경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류지의 다른 성씨들은 독일어화된 형태로 남았다. 예컨대 Pebbia 가문은 Bebie가 되었고, 의사이자 자연철학자인 Taddeo Duno로 대표되는 Duno 가문은 이 집단의 지적 지도층에 속하였다.4
아스코나의 귀족 가문 출신인 Taddeo Duno(1523–1613)는 1549년 8월 5일 Giovanni Beccaria와 함께 로카르노의 신학 논쟁에 참여하였다. 취리히에서 그는 반세기 넘게 의술을 행하였으며, De respiratione contra Galenum(1588)과 Epistolae medicinales(1592)를 출간하였다. 그는 이 저작에서 질병의 발생을 기상 관측과 연관 지었다.5 그의 경력은 로카르노 공동체가 상인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로카르노의 전문직 엘리트를 이루었던 의사, 법학자, 공증인들은 취리히에 학식의 수준과 이탈리아 법률·의학 문화에 대한 친숙함을 가져왔고, 이는 남부와 이 도시의 지적 유대를 강화하였다.
주석
- Martin Lassner, “Zanino, Evangelista”,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Suisse(DHS), 2012년 5월 21일 판, https://hls-dhs-dss.ch/fr/articles/028581/ (2026년 10월 4일 확인): “Il fut le seul parmi eux qui, malgré les limites imposées par les corporations, passa du commerce à la production, avec le tissage du satin (1558) et la fabrication du basin de Milan (1565).” 이 항목은 Ulrich Pfister, Die Zürcher Fabriques. Protoindustrielles Wachstum vom 16. zum 18. Jahrhundert (Zürich 1992), 특히 39–40에 근거한다. ↩
- Lassner, “Zanino”(앞의 문헌): “Première grande entreprise industrielle de Suisse alémanique, son établissement combinait manufacture centralisée et travail à domicile (Verlagssystem), mais se solda par un échec à cause du manque de capitaux et de la spéculation.” ↩
- Martin Lassner, “Muralt, Johannes”, DHS, 2010년 9월 2일 판, https://hls-dhs-dss.ch/fr/articles/029398/ (2026년 10월 4일 확인): “fille de Cornelius, tisserand en velours”인 Elisabeth Thoma와 혼인. ↩
- 스위스 국립박물관 블로그, “The Protestants of Locarno”(2024년 2월), https://blog.nationalmuseum.ch/en/2024/02/the-protestants-of-locarno/ (2026년 10월 4일 확인). 망명 가문 가운데 Pebbia(후의 Bebie)와 Duno를 들고, 가문 문장이 그려진 17세기 패널화를 언급한다. ↩
- Crivelli, “Duno, Taddeo”(앞의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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