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영병, 억류자, 그리고 루가노의 총파업
국경은 물자뿐 아니라 사람도 실어 왔다. 전쟁 초기부터 교전국 군대의 탈영병과 징집 기피자들이 스위스로 넘어왔다. 연방평의회는 이들의 체류를 허용하였고, 1916년 6월 30일에는 이들을 국경 너머로 추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1 그 수는 1916년 4월 701명에서 1917년 9월 말 15,278명으로, 1919년 5월에는 25,894명으로 늘었다. 가장 큰 집단은 이탈리아인으로 11,818명이었고, 이어 독일인 7,203명, 오스트리아-헝가리인 2,463명, 프랑스인 2,451명, 러시아인 1,129명의 순이었다.2 이탈리아 탈영병 다수는 티치노주(칸톤)에 거주하였으며, 그곳의 대규모 이탈리아인 공동체 안에서 일자리와 숙소를 구하였다. 1910년 당시 인구 14,988명이던 루가노 기초자치단체(게마인데)에서 외국인은 인구의 43.6퍼센트를 차지하였다.3 스위스는 또한 병들고 부상당한 전쟁포로를 억류 목적으로 받아들였다. 1916년 초부터 여러 국적의 포로 12,000명 이상이 주로 프랑스어권과 독일어권 스위스의 요양지에 수용되었다.4 전쟁의 사회적 긴장은 티치노주에도 미쳤다. 1918년 7월 루가노에서는 주 노동회의소 서기이자 사회주의 일간지 Libera Stampa의 창간자인 Guglielmo Canevascini가 이끄는 총파업이 일어났다.5 1922년 주 정부 최초의 사회주의자 각료가 되어 1959년까지 재임한 Canevascini는 이 장에서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망명자들의 보호자로 다시 등장할 것이다.6 루가노의 파업은 1918년 11월의 전국 총파업보다 앞서 일어났다. 『역사사전』의 표현을 빌리면, 전국 총파업에서는 급진당, 보수당 및 농민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부르주아 블록이 승리하였다.7
전시 경제로서의 밀수
전쟁은 이탈리아와의 국경을 상시적인 밀수 지대로 바꾸어 놓았다. 이탈리아는 많은 물품의 수출을 금지하거나 제한하고 다른 물품은 배급제로 하였으며, 스위스는 공급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체적인 수출 금지 조치를 시행하였다. 국경 양쪽의 가격과 공급 사정의 차이는 밤에 산이나 호수를 건너 물품을 운반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윤을 안겨 주었다. 루가노 호숫가 칸티네 디 간드리아에 있는 스위스 관세박물관은 이 긴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이탈리아와의 국경에서 불법 교역은 20세기 중반까지 번성하였으며, 전시와 전후에 매우 널리 퍼졌던 밀수는 무엇보다 담배, 설탕, 커피, 쌀, 소금처럼 수요가 많고 부족한 물품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이다.8 1835년에 지어진 박물관 건물 자체는 1921년까지 스위스 국경수비대의 초소로 쓰였다.9
이 교역의 법적 지위는 비대칭적이었다. 티치노주에서 이탈리아로 커피나 담배를 운반한 밀수업자는 이탈리아 관세법을 위반하였고, 전쟁 중에는 이탈리아의 전시 규정도 위반하였다. 스위스에서는 스위스의 수출통제나 스위스 관세를 회피하지 않는 한 그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것이었다. 외국의 재정 및 경제 법규 위반을 외국의 문제로 취급하는 이 비대칭성은 티치노주 국경 경제의 구조적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제D.II장에서 보듯이, 1945년 이후 이는 커피와 담배뿐 아니라 은행권과 유가증권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 기원은 국경 지대의 오랜 관세 경제에 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은 이에 근대적인 형태를 부여하였다. 이탈리아 국가가 외환과 자본의 이동을 제한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기 때문이다.
주석
- Albert Portmann-Tinguely and Philipp von Cranach, “Flüchtlinge”, HLS 수록, 2016년 1월 7일 판, https://hls-dhs-dss.ch/de/articles/016388/. ↩
- Hervé de Weck, “Diserzione”, DSS 수록, 2006년 10월 23일 판, https://hls-dhs-dss.ch/it/articles/008595/2006-10-23/. ↩
- Negro, “Lugano (Gemeinde)”(앞의 글). ↩
- Hervé de Weck, “Internierungen”, HLS 수록, 2008년 5월 13일 판, https://hls-dhs-dss.ch/de/articles/008704/. ↩
- Gabriele Rossi, “Canevascini, Guglielmo”, DSS 수록, 2003년 8월 28일 판, https://hls-dhs-dss.ch/it/articles/003499/. ↩
- Rossi, “Canevascini, Guglielmo”(앞의 글): 1907–1922년 Camera del lavoro 서기, 1913년 Libera Stampa 창간, 1922–1959년 주 정부 최초의 사회주의자로서 주 정부위원회(State Council) 위원. ↩
- Fuhrer et al., “Guerra mondiale, Prima”(앞의 글). ↩
- 연방관세청, Museo delle dogane svizzero(안내책자, 2017년 4월), https://www.bazg.admin.ch/dam/it/sd-web/KYDqZH4XOhDY/broschuere-schweizer-zollmuseum_it.pdf: “Al confine con l'Italia, il commercio illegale rimase fiorente sino alla metà del XX secolo. Il contrabbando, molto diffuso in tempo di guerra e nel dopoguerra, riguardava soprattutto merci ambite e carenti come sigarette, zucchero, caffè, riso e sale.” ↩
- 연방관세청, Museo delle dogane svizzero(앞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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