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망명 정책과 열강의 압력
1848년까지 망명자 비호는 주(칸톤)의 소관이었다. 1815년의 연방조약이 주의 주권을 회복시킨 뒤, 1830년 이후 등장한 자유주의 주들은 프랑스, 피에몬테, 독일, 폴란드에서 온 많은 망명자를 받아들였다.1 열강은 위협으로 응수하였다. 연방의회는 1823년과 1836년의 제1차 및 제2차 Fremdenkonklusum(외국인 결의)으로 대응하였다. 1823년 7월 14일 언론 결의와 함께 채택된 제1차 결의는 전반적인 검열을 도입하고, 일부 편집인의 입을 막았으며, 선동 행위가 입증된 망명자의 추방을 규정하였다. 제2차 결의는 외국인 망명자에 대한 제한 조치를 갱신하였으며, 여기에도 추방이 포함되었다.2 티치노에 이러한 결의들은 끊임없는 마찰의 원인이었다. 이 주는 수천 명의 주민이 이주하여 일하던 롬바르디아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주 정부는 오스트리아의 항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보수 체제조차 티치노 정부가 얼마나 쉽게 굴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1822년 콰드리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요청에 따라 Gazzetta di Lugano를 폐간시켰다.3
스위스 외교는 오래 지속된 법적 해법을 발전시켰다. 1828년의 프랑스와의 범죄인 인도 조약을 개정한 것을 시작으로, 스위스는 1833년부터 여러 양자 조약에서 정치범죄 때문에 도피한 사람은 인도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하였다.4 인도 의무가 있는 일반 범죄와 인도 의무가 없는 정치범죄의 구별은 스위스 비호법의 핵심이 되었다. 이 구별은 이 장의 마지막 절에서 다루는 「국제형사사법공조에 관한 연방법」 제3조에서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티치노의 망명자들에게 이는 오스트리아가 이들의 감시나 국경으로부터의 격리를 요구할 수는 있어도 이들의 인도를 받아 낼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롬바르디아에 의존한 주
주 정부의 행동의 자유는 티치노의 모든 정치인이 알고 있던 경제적 사실에 의해 제약되었다. 이 주는 롬바르디아에 기대어 살았다. 티치노의 계곡들에서 나온 건축 자재, 목재 및 그 밖의 물품은 롬바르디아 시장으로 갔고, 수천 명의 티치노 사람이 밀라노와 그 주변 지역에서 일하였다. 카프리아스카 출신의 석공, 말칸토네 출신의 가마꾼, 발 콜라 출신의 구리 세공인, 석재공과 대리석공, 짐꾼, 군밤 장수, 초콜릿 제조인, 카페 주인, 우유 장수, 요리사와 가사 하인, 여관 주인, 상인과 운송업자가 그들이었다. 스테파니아 비앙키(Stefania Bianchi)의 밀라노 이주 티치노인 연구는 마지막 스포르차 공작들의 시대부터 라데츠키의 시대까지 이러한 존재를 추적하며, 계절 이주자, 주기적 이주자와 장기 이주자, 행상인과 국경 통근자들이 체류의 권리를 롬바르디아 당국의 호의에 의존하는 인구 집단을 형성하였음을 보여 준다.5 다른 주 출신의 스위스 상인들도 롬바르디아에 많았다. Dizionario storico della Svizzera는 1848년 무렵 밀라노와 베르가모에 수천 명의 스위스인이 있었으며, 그 대부분이 견직물, 면직물, 모직물 거래에 종사하였다고 서술한다.6
이러한 의존은 오스트리아가 주를 길들이고자 할 때마다 사용한 지렛대였다. 국경을 봉쇄하거나 티치노 노동자들을 롬바르디아에서 추방하겠다는 위협은 벨린초나에서 어떤 외교 문서보다도 무겁게 받아들여졌다. 그럼에도 1839년 이후 주를 통치한 급진파는 망명자들을 보호하기로 하였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정치적 신념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그들 자신의 정당성이 망명자들이 대변하는 자유주의 대의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웃 나라에 대한 경제적 의존과 그 반대자들과의 정치적 연대 사이의 긴장은 이 시기 전체를 관통하였다. 이 긴장은 이 장의 뒷부분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오스트리아가 티치노 사람들을 롬바르디아에서 추방한 1853년에 정점에 이르렀다. 이는 또한 연방 전체의 이익을 저울질해야 했던 연방 당국이 왜 그토록 자주 주에 손님들을 단속하라고 압박하였는지를 설명해 준다.
주석
- Walter Kälin, “Asyl”, Historisches Lexikon der Schweiz (HLS) 수록, 2002년 11월 26일 판, https://hls-dhs-dss.ch/de/articles/010374/2002-11-26/ (2026년 10월 4일 확인). ↩
- Kälin, “Asyl” (앞의 문헌): “Die Tagsatzung reagierte im Ersten und Zweiten Fremdenkonklusum von 1823 bzw. 1836 mit restriktiven Massnahmen (inklusive Ausweisungen)”; François Genoud, “Presse-und Fremdenkonklusum”, Historisches Lexikon der Schweiz (HLS) 수록, 2005년 8월 10일 판, https://hls-dhs-dss.ch/de/articles/017228/2005-08-10/ (2026년 10월 5일 확인), 1823년 7월 14일의 결의, 그 검열 규정 및 “die der Agitation überführt wurden” 망명자의 추방, 그리고 1829년의 폐지에 관하여. ↩
- Archivio di Stato del Cantone Ticino, 전시 해설문 “Tipografie”, PDF, https://m4.ti.ch/fileadmin/DECS/DCSU/ASTI/Documenti/Sb/Mostra/Tipografie.pdf (2026년 10월 4일 확인): Gazzetta di Lugano는 1822년 콰드리에 의해 “su richiesta del governo austriaco” 폐간되었다. ↩
- Kälin, “Asyl” (앞의 문헌): “Ab 1833 – in einer Revision des Auslieferungsvertrages mit Frankreich von 1828 – konnte in verschiedenen bilateralen Auslieferungsverträgen die Nichtauslieferung von Flüchtlingen, die wegen politischer Delikte geflohen waren, vereinbart werden.” ↩
- Stefania Bianchi, “Ticinesi a Milano e in Lombardia dagli ultimi Sforza a Radetzky”, Studi Emigrazione LVIII, no. 224 (2021), PDF, https://www.cser.it/wp-content/uploads/2025/04/Ticinesi-a-Milano-e-in-Lombardia-Bianchi-2021.pdf (2026년 10월 4일 확인). 직종들은 비앙키의 연구에 언급되어 있으며(“fornaciai malcantonesi, ramai della val Colla, muratori della Capriasca”; “facchini, brentatori, schiostrari, marronai, cioccolatieri, caffettieri, lattai e lattaie, domestiche, cameriere, cuochi”; “ristoratori, osti e bettolieri”; “commercianti, spedizionieri e imprenditori”), 이 연구는 또한 “migrazioni di uomini, ma anche di merci destinate ai mercati lombardi”에 관해서도 언급한다. 제A.III장 및 제A.IV장도 참조. ↩
- Marianne Bauer, “Royaume lombard-vénitien”, DHS 수록, 2011년 3월 24일 판, https://hls-dhs-dss.ch/fr/articles/006630/2011-03-24/ (2026년 10월 4일 확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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