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디노 오키노와 취리히의 이탈리아인 회중
로카르노인들은 독일어권인 취리히 개혁교회에 흡수되지 않았다. 이들은 이탈리아어로 예배를 드리는 독자적인 회중을 구성하였고, 취리히 당국은 이를 허용하였다. 이는 교회 규정이 모든 설교를 시의회와 그 목사들의 통제 아래 두고 있던 도시에서 상당한 양보였다. 이는 또한 취리히에서뿐 아니라 제네바, 런던, 프랑크푸르트, 네덜란드에서도 프로테스탄트 망명자 교회의 역사 전반에 걸쳐 거듭 나타나게 될 문제를 낳았다. 누가, 어떤 언어로, 누구의 규율 아래 망명자들에게 설교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555년 취리히가 내놓은 답과 8년 뒤에 이어진 위기는, 수용 도시가 외국인 공동체를 보호하는 동시에 통제할 수 있었던 방식을 보여 준다.
오키노의 초빙
회중에게는 이탈리아어로 설교할 수 있고, 그 명성으로 회중에 위상을 부여할 수 있으며, 취리히 교회가 그 정통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목사가 필요하였다. 1555년 여름 렐리오 소치니가 이끄는 대표단이 바젤로 가서, 베르나르디노 오키노에게 취리히로 옮겨 로카르노 출신 이탈리아 망명자 공동체의 목사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다.1 소치니는 1525년 시에나에서 법학자 소(小)마리아노 소치니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547년 무렵 이탈리아를 영영 떠났다. 수년간 여행한 끝에 그는 1551년 말 무렵 취리히로 돌아왔고, 이후 이 도시는 그의 행보의 중심지로 남았다.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 불링거가 그의 주된 서신 상대이자 보호자였다.2 전 카포디스트리아 주교로서 브레갈리아에서 개혁파 설교자로 활동하였던 피에르 파올로 베르제리오가 오키노가 도착하기 전 짧은 기간 동안 로카르노인들을 섬겼다.3
오키노는 그의 세대에서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설교자였다. 1487년 시에나에서 태어난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갔고, 1534년 카푸친회로 옮겨 1538년부터 1542년까지 그 총대리를 지냈다.4 스페인의 영성 저술가 후안 데 발데스의 영향으로 그는 개혁파의 신념에 이르렀다. 1542년 새로 재편된 로마 종교재판소가 그를 소환하자 그는 제네바로 도피하였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이탈리아어 회중의 목사로 일하였다. 이어 1547년까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이탈리아 프로테스탄트들을 섬겼고, 피에트로 마르티레 베르밀리와 함께 잉글랜드로 건너갔다.5 메리 1세가 즉위한 뒤 그는 대륙으로 돌아왔다. 1555년부터 1563년까지 그는 취리히에 있는 로카르노 망명자 회중의 목사였다.
시의회 아래의 망명자 교회
취리히의 이탈리아인 회중은 교회 안의 교회였다. 그 목사는 이탈리아어로 설교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젊은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쳤으나, 이는 취리히 목사들의 감독 아래, 그리고 도시의 교회 규정 안에서 이루어졌다. 베카리아는 교리문답 교사이자 집사로서 그를 보좌하였다.6 오키노는 자신의 회중을 위하여 여러 저작을 썼는데, 그 가운데에는 1561년에 출간된 대화 형식의 이탈리아어 교리문답이 있다.7 시의회는 언제든지 설교 허가를 철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세속 당국이 그 영역 안에서 교리의 순수성과 교회의 규율에 책임을 진다는 취리히 종교개혁의 일반 원칙을 반영한 것이었다.
로카르노인들에게 회중은 예배 장소 이상의 것이었다. 회중은 공동체가 낯선 도시에서 그 정체성과 언어, 내부의 연대를 지켜 나가는 기관이었다. 처음 몇 세대 동안 구성원들은 서로 거래하였는데, 마르티노 무랄토가 동료 망명자 파리소 아피아니의 벨벳·견직 사업에 투자한 것이 이를 보여 준다. 또한 마르티노 무랄토가 알로이시오 오렐리의 딸 루치아와 혼인한 것이 보여 주듯이, 주요 가문들은 이미 혼인으로 서로 결속되어 있었다.8 공동체의 공동 재산을 관리하고 동맹회의(Tagsatzung)에서 공동체를 대표한 마르티노 무랄토는 견직물 교역의 투자자인 동시에 회중의 평신도 지도자였다.9 따라서 회중은 사회적·경제적 네트워크이기도 하였다. 이는 제네바와 그 밖의 지역에서의 위그노 망명의 역사가 확인해 주는 망명자 교회의 특징이다(제네바 편 참조).
주석
- Miguel Gotor, “Ochino, Bernardino”,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제79권(Rome: Istituto della Enciclopedia Italiana, 2013), Treccani 온라인, https://www.treccani.it/enciclopedia/bernardino-ochino_(Dizionario-Biografico)/ (1555년 중반 렐리오 소치니가 이끄는 대표단이 그에게 “trasferirsi a Zurigo e diventare il pastore della comunità di rifugiati italiani di Locarno”할 것을 제안함). ↩
- Mario Biagioni, “Sozzini, Lelio”,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제93권(Rome: Istituto della Enciclopedia Italiana, 2018), Treccani 온라인, https://www.treccani.it/enciclopedia/lelio-sozzini_(Dizionario-Biografico)/ (“Nacque a Siena nel 1525”, “sesto dei tredici figli del giureconsulto Mariano il Giovane”; “Rientrò a Zurigo verso la fine del 1551”; 취리히는 “la città che rappresentò da allora il centro dei suoi spostamenti”). 영어판 위키백과 문서는 그가 취리히에 정착한 시기를 1553년 5월로, 그의 사망일을 1562년 5월 4일로 기재하고 있다. 여기서는 위 사전을 따른다. ↩
-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제VIII권, § 40(앞의 주)(회중은 “was served for a short time by Vergerio”); Schaff, § 38(앞의 주)(베르제리오는 1550– 1553년 브레갈리아의 비코소프라노에서 목사로 활동함). ↩
- Emidio Campi, “Ochino, Bernardino”, 스위스 역사사전(DSS), 2008년 2월 6일 판, https://hls-dhs-dss.ch/it/articles/010775/. ↩
- Campi, “Ochino, Bernardino”(앞의 주)(“Dal 1555 al 1563 fu pastore della comunità degli esuli locarnesi a Zurigo”). ↩
- Campi, “Beccaria, Giovanni”(앞의 주). ↩
-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제VIII권, § 40(앞의 주). 교리문답의 제목과 인쇄업자. ↩
- Pauli Falconi, “Muralto, Martino”(앞의 주)(“l’impresa di tessitura dei velluti e tintura della seta di Pariso Appiani”에 대한 투자; 알로이시오의 딸 루치아 오렐리와의 혼인); Illi, “Orelli, Aloisio”(앞의 주). 취리히의 로카르노 가문들 사이의 사업 협력 양상은 제B.II장에서 상술한다. ↩
- Pauli Falconi, “Muralto, Martino”(앞의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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