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가 그로부터 배운 것
정기시의 경험은 제네바의 기억 속에 하나의 정치적 교훈을 남겼다. 고립된 상업 도시는 이웃의 처분에 맡겨진다는 것이다. 이 교훈에 대한 제네바의 대응은 여러 단계에 걸쳐 형성되었으며, 이어지는 장들에서 이를 서술한다.
첫째 단계는 스위스 주(칸톤)들과의 동맹 모색이었다. 1462년의 개입 이후 제네바와 주들의 관계는 발전하였다. 16세기 초에는 프리부르와, 이어서 프리부르 및 베른과 공동시민권(combourgeoisie) 조약이 체결되었다.1 이 동맹들 덕분에 제네바는 사보이아에 저항하고 독립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둘째 단계는 정치적 해방이었다. 1530년대에 제네바는 주교의 권위와 사보이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제네바는 독자적인 제도를 갖춘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베른의 지원으로 얻은 이 독립은 종교개혁의 수용과 함께 이루어졌다.
셋째 단계는 경제 재건이었다. 정기시를 잃은 제네바는 새로운 번영의 원천을 찾아야 했다. 제네바는 그 원천을 주로 개신교 피난민의 수용에서 찾게 된다. 이들은 인쇄업, 직물업, 견직업, 금세공업, 그리고 훗날 시계 제조업을 들여왔다. 또 다른 원천은 교역과 은행업의 발전이었다.
마지막으로 넷째 단계는 신중함의 문화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제네바 사람들은 번영이 되돌려질 수 있다는 것, 동맹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평판은 천천히 얻고 빨리 잃는다는 것을 배웠다. 칼뱅주의 윤리로 더욱 강화될 이 문화는 금융 중심지의 관행에 지속적인 흔적을 남겼다.
이 역사의 역설은 정기시의 상실이 근대 금융 중심지의 탄생을 준비하였다는 점이다. 정기시의 상실은 제네바 경제를 약화시킴으로써 도시가 16세기의 정치적·종교적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게 하였다. 전통적인 수입원을 빼앗음으로써 도시가 스스로를 재창조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리고 도시가 자신의 취약성을 느끼게 함으로써 그 존속을 보장한 동맹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다음 부에서는 칼뱅이 주요 행위자 가운데 하나였던 이 전환점을 서술한다.
주석
-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Suisse(DHS, 스위스 역사 사전), “Berthelier, Philibert” 항목(1519년 프리부르와 교섭한 공동시민권). Archives d’État de Genève, “De la combourgeoisie au blocus, 1526-1534”: 주교와 사보이아 공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26년 2월 베른 및 프리부르와 공동시민권 조약이 체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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