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기 제네바의 네트워크
제네바의 기관들은 하나의 국제 네트워크를 낳았다. 목사회(Compagnie des pasteurs)는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독일과 중부 유럽의 개혁파 교회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아카데미는 이들 나라로 흩어져 나간 목사들을 길러 냈다. 인쇄업자들은 유럽 전역에 책을 보급하였다. 난민들은 고국에 남았거나 다른 곳에 정착한 가족들과 유대를 유지하였다. 이리하여 제네바는 유럽 대륙 규모의 정보, 연대와 신뢰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었다.
이 네트워크는 훗날 위그노 은행가들의 힘이 될 모든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신뢰를 보장하는 가족적·종교적 유대, 정보를 전달하는 정기적 서신 교환, 역경을 견뎌 낼 수 있게 하는 연대, 그리고 여러 시장에 대한 접근을 열어 주는 지리적 분산이 그것이다. 17세기에 낭트 칙령의 폐지가 새로운 대탈출을 불러일으켰을 때, 이 네트워크들은 상업 및 은행 디아스포라의 토대가 된다. Herbert Lüthy는 이 “개신교 은행”에 관한 연구를 내놓았고, 이 연구는 고전이 되었다. C부는 이 연구에 기대고 있다.1
16세기 제네바의 네트워크에는 정치적 차원도 있었다. 제네바는 적대 세력에게 개신교 인터내셔널의 중심으로 인식되었고, 거듭된 위협의 표적이 되었다. 사보이아는 이 도시를 되찾으려는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1602년 사보이아 군대가 기습으로 제네바를 장악하려 한 에스칼라드(Escalade) 사건이 그 절정이었다. 이 사건은 지금도 해마다 기념된다.2
이 역사가 금융 중심지에 주는 교훈은 두 가지이다. 신뢰에 기초한 국제 네트워크는 위기를 견뎌 내고 스스로를 재편할 수 있는 상당한 자산이다. 그러나 어떤 정치적 또는 종교적 대의와 동일시되는 네트워크는 그 대의와 싸우는 이들의 적대에 금융 중심지를 노출시키기도 한다. 전 세계의 고객과 기관에 봉사하는 중립적 장소를 자처하는 오늘날의 제네바는 이 이중의 경험을 물려받았다.
주석
- Herbert Lüthy, La Banque protestante en France de la Révocation de l’Édit de Nantes à la Révolution, 전 2권, Paris, S.E.V.P.E.N., 1959–1961(재간 Paris, Éditions de l’EHESS, 1998). ↩
- Archives d’État de Genève(archives-etat-ge.ch), “Contexte 1564-1602”: 1602년 12월 11일 밤부터 12일에 걸친 사보이아의 공격, 그리고 제네바의 주권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한 1603년 7월 21일의 생쥘리앵 조약. Wikipedia(en), “L’Escala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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