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의 엘리트층 편입
망명자 출신 가문들은 권력 밖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여러 세대에 걸쳐 그중 다수가 시민권(부르주아 신분)을 취득하였고, 이어 혼인을 통하여 옛 가문들과 결합하였다. 제1차 망명(Refuge)의 여러 가계, 특히 이탈리아계와 프랑스계 가계는 18세기에 공화국의 지배 가문에 속하였으며, 소평의회(Petit Conseil)에 자리를 차지하고 신디크(syndic) 직을 맡았다.1
이러한 통합은 암묵적인 규칙을 따랐다. 그것은 시민권을 사고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재산, 공동체의 도덕적 요구에 부합하는 품행, 신중한 혼인 동맹, 그리고 도시의 제도에 대한 참여를 전제로 하였다. 그것은 여러 세대가 걸리는 일이었다. 17세기 말에 도착한 제2차 망명의 망명자들 가운데 18세기 동안 권력의 정점에 오른 이는 더 적었는데, 이는 도시 귀족층이 점차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제네바의 도시 귀족층은 좁은 엘리트층을 이루었으며, 흔히 윗마을(구시가 상부)에 거주하고 주변 지역에 별장을 소유하였다. 이들은 정치권력, 부, 문화적 위세를 함께 갖추었다. 그 구성원은 행정관, 장교, 목사, 교수, 상인, 은행가였다. 이들은 자본을 외국 공채와 파리 상사들의 사업에 투자하였다. 요컨대 이들은 제네바 금융 중심지의 사회적 핵심을 이루었다.
소수의 가문에 권력과 부가 집중된 데에는 장점이 있었다. 연속성, 결속, 상호 신뢰, 자본 동원 능력이 그것이다. 그러나 단점도 있었다. 폐쇄성, 보수주의, 그리고 배제된 계층과의 긴장이 그것이다. 제5장은 이러한 긴장이 어떻게 18세기 말 제네바 혁명으로 이어졌는지 보여 줄 것이다.
주석
-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Suisse (DHS) [스위스 역사 사전], 항목 “Réfugiés protestants”: 제네바는 1549년부터 1587년 사이에 약 8,000명의 망명자를 받아들였으며, 그중 약 3,000명이 영구 정착하여 인구의 30퍼센트를 차지하였다. 부를라마키(Burlamaqui), 디오다티(Diodati), 미켈리(Micheli), 칼란드리니(Calandrini) 등 루카 출신 가문들이 도시 귀족층에 진입하였다. 수십 명의 위그노 인쇄업자들이 이 도시를 성경과 시편집 출판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망명자들은 섬유, 견직, 국제 은행업, 사치품 산업을 활성화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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