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Refuge): 8,000명의 난민은 인구 1만 3,000명의 도시를 어떻게 바꾸었나
피난의 도시라는 제네바의 명성은 두 차례의 개신교도 이주 물결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는 16세기의 물결이고, 다른 하나는 1685년 낭트 칙령 폐지 이후의 물결이다. 이 글은 주요 자료들이 두 물결에 관해 제시하는 수치를 정리하고, 그 자료들이 어디에서 서로 엇갈리는지 보여주며, 그 수치가 훗날 금융 중심지의 경제적 기반에 관해 무엇을 드러내는지 추적한다.
수치에 관한 일러두기
피난(Refuge)에 관한 모든 수치는 구호 기록, 인구 조사, 그리고 후대 역사가들의 연구에서 도출한 추정치이다. 여기서 사용한 자료들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이 때문에 이 글의 바탕이 된 책은 이 시기에 관한 수치와 연대를 검증 대상으로 다룬다. 따라서 아래의 각 수치는 이를 제시한 기관이나 저자를 밝혀 두었으며, 독자는 이를 통해 각 추정치를 서로 비교하여 따져볼 수 있다.
제1차 피난, 1549–1587년
『스위스 역사사전』(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Suisse, DHS)에 따르면 제네바는 1549년부터 1587년까지 약 8,000명의 개신교 피난민을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 약 3,000명이 영구 정착하였으며, DHS는 이 집단이 인구의 30 %에 해당한다고 본다. 부를라마키(Burlamaqui), 디오다티(Diodati), 미켈리(Micheli), 칼란드리니(Calandrini) 등 루카 출신 가문들은 도시 귀족층에 편입되었고, 수십 명의 위그노 인쇄업자들은 이 도시를 성경과 시편집 출판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훗날 부담의 상당 부분을 짊어질 기관도 이미 존재하였다. 개신교 박물관(Musée protestant)은 다비드 드 뷔장통(David de Busanton)이 설립한 프랑스 기금(Bourse française)의 설립 연도를 1545년으로 본다.
낭트에서 퐁텐블로까지
두 물결 사이의 기간은 하나의 법적 타협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디디에 부아송(Didier Boisson)은 『유럽 디지털 역사 백과사전』(Encyclopédie d’histoire numérique de l’Europe)에서 1598년 4월 30일의 낭트 칙령이 양심의 자유와 제한된 예배의 자유를 부여하였다고 설명한다. 이 칙령은 93개의 일반 조항, 56개의 특별 조항, 그리고 두 건의 국왕 칙서로 구성되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150개의 안전 거점에 관한 규정도 있었다. 같은 저자는 칙령이 단계적으로 무력화된 과정을 추적한다. 1661년부터 루이 14세는 칙령을 엄격하게 적용하고자 하였다. 1676년 개종 기금이 설치된 뒤, 지방 감찰관 마리야크(Marillac)는 1681년 푸아투 지방에 국왕 용기병의 배치를 이끌어냈고, 이로 인해 약 3만 명이 개종하였다.
1685년 10월 18일의 퐁텐블로 칙령은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개신교 교회의 철거를 명하였으며, 왕국으로부터의 이주는 여전히 금지되었다. 피난에 관한 프랑스어판 위키백과 문서에 따르면, 출국하다 붙잡힌 남성은 갤리선 노역형에, 여성은 신병 구금과 재산 몰수에 처해졌다. 이 때문에 도피자들은 종종 돈을 받고 길을 안내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몰래 국경을 넘어야 하였다. 남아서 압력 아래 개종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개신교 박물관의 기록에 따르면 이주에 대한 처벌이 1699년과 1713년에 다시 강화되었다. 본당 신부들은 1686년부터 새 개종자 명부를 관리하며 신앙으로 되돌아간 사례를 당국에 보고하였다.
얼마나 떠났고 어디로 갔는가
자료들이 가장 크게 엇갈리는 지점은 대탈출의 규모이다. 부아송은 1680년부터 1715년까지 이주한 개신교도의 수를 15만 명에서 18만 명으로 보며, 그 행선지는 잉글랜드, 네덜란드 연합주, 제네바, 그리고 여러 독일 국가였다. 프랑스어판 위키백과 문서는 왕국 내 약 80만 명의 개신교도 가운데 약 20만 명이 떠났다고 기술한다. DHS는 프랑스를 떠난 위그노를 약 15만 명으로 보고, 그 가운데 약 6만 명이 스위스를 거쳐 간 것으로 일반적으로 추정되며 그 정점은 1687년이었다고 밝힌다. 이 가운데 약 2만 명이 스위스의 주(칸톤)들에 영구 정착하였다.
포츠담 칙령에 관한 영어판 위키백과 문서가 보여주듯, 다른 국가들도 같은 이주민을 두고 경쟁하였다. 이 문서에 따르면, 낭트 칙령 폐지 며칠 뒤인 1685년 10월 29일 브란덴부르크의 대선제후는 위그노에게 거주지 선택의 자유, 6년에서 10년간의 관세 및 조세 면제, 주거, 그리고 시민적 평등을 제안하였다. 약 2만 명의 피난민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 정착하였으며, 이 수치는 스위스 영구 정착에 관한 DHS의 추정치와 일치한다.
1687년, 압박 속의 제네바
제네바에 지워진 부담은 정착보다는 통과의 부담이었다. 개신교 박물관은 이 도시가 1680년부터 1689년까지 약 3만 명의 피난민을 지원하였으며, 1687년에는 도착자가 하루 350명에 달하였다고 추정한다. 그해에만 프랑스 기금은 약 1만 플로린을 지급하였다. 스위스 국립박물관 블로그의 2019년 글에 따르면, 1687년 8월 30일에는 8,000명이 도착하였는데, 당시 제네바의 주민은 1만 6,000명에 불과하였다.
제네바는 엄격한 감시 아래 이들을 받아들였다. 개신교 박물관은 1679년부터 제네바 주재 프랑스 변리공사가 위그노를 추방하라고 당국을 압박하였다고 지적한다. 공화국이 피난민의 다른 곳으로의 이동을 도우면서 체류하는 인원을 제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장기적인 인구학적 효과는 뚜렷하였다. 제네바 국립문서보관소(Archives d’État de Genève)는 1725년경 약 2만 명, 1770년경 2만 5,000명의 주민에 더하여 교외와 속령에 약 3,000명이 있었다고 집계한다. 문서보관소는 이러한 성장을 낭트 칙령 폐지 이후의 프랑스인 이주(3,000명에서 4,000명의 피난민으로 추정)와 영아 사망률의 감소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피난민에서 산업과 자본으로
제2차 피난의 경제적 성과는 직물 관련 수치에서 읽어낼 수 있다. DHS에 따르면 프랑스는 1686년 앵디엔(indiennes)이라 불리던 날염 캘리코의 소비와 제조를 금지하였고, 이로써 왕국 밖의 생산자들에게 큰 밀수 시장이 열렸다. 제네바에는 1710년까지 앙투안 파지(Antoine Fazy)의 공장을 비롯한 네 곳의 캘리코 공장이 있었으며, 1720년대에는 일곱 곳이 가동 중이었다. 1759년 프랑스가 금지를 해제한 뒤, 제네바와 뇌샤텔에는 각각 약 열 곳의 이러한 공장이 있었고, 최소 2,5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였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18세기 말 무렵에는 8,000명에서 1만 명이 스위스의 캘리코 날염업에 종사하였다.
시계 제조업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난다. DHS는 1550년부터 도착한 위그노 피난민들이 특히 휴대용 시계 분야에서 전문 엘리트의 기술을 들여왔다고 기술한다. 같은 자료는 시계 제조업에의 진입을 규율한 동업조합인 시계공 장인제도의 창설을 1601년으로 본다. 이러한 업종의 이윤은 훗날 제네바 가문들이 외국 공채에 투자한 자본의 원천이 되었다. 그 부를 누가 나누어 가질지는 계층화된 법질서가 결정하였다. 제네바 국립문서보관소는 거주 외국인의 제네바 태생 자녀인 나티프(natifs)가 1738년 이후에야 모든 업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정치적 권리는 없었다고 지적한다.
이 사례가 주는 시사점
추정치는 엇갈린다. 위그노 대탈출에 관한 수치는 자료와 대상 기간에 따라 15만 명에서 약 20만 명까지 다양하다. 따라서 어떤 수치든 그 출처와 연대를 함께 밝혀야 한다.
통과가 정착보다 컸다. DHS는 스위스를 거쳐 간 사람들 가운데 약 3분의 1이 머물렀다고 추정하며, 제네바 국립문서보관소는 낭트 칙령 폐지 이후 제네바에 정착한 사람을 3,000명에서 4,000명으로 본다.
구호가 경제적 기반을 놓았다. 피난민의 기술은 캘리코, 시계 제조 및 관련 산업을 키웠고, 이들 산업의 이윤은 훗날 18세기 제네바 금융 중심지의 자본을 공급하였다.
참고 자료
-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Suisse, “Réfugiés protestants”, “Indiennes” 및 “Horlogerie” (Fallet, Veyrassat), hls-dhs-dss.ch (온라인 항목, 작성일 미기재).
- Didier Boisson, “L’Édit de Nantes et sa révocation (1598-1685)”, Encyclopédie d’histoire numérique de l’Europe, ehne.fr (작성일 미기재).
- Musée protestant, “Le Refuge huguenot en Suisse” 및 “Les nouveaux convertis”, museeprotestant.org (작성일 미기재).
- Musée national suisse, 블로그, “L’arrivée des huguenots” (2019).
- Wikipédia (fr), “Refuge (protestantisme)” (작성일 미기재).
- Wikipedia (en), “Edict of Potsdam” (작성일 미기재).
- Archives d’État de Genève, “Genève au XVIIIe siècle”, archives-etat-ge.ch (작성일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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