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파지와 “금융 귀족” 비판
제임스 파지는 그가 제네바 금융 귀족이라 부른 계층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명문 가문들은 신용을 자신들의 집단에만 허용하고, 자본을 해외에 투자하며, 도시의 경제 발전을 소홀히 하였다. 그는 장인, 상인, 기업가가 이용할 수 있는 신용기관을 설립하고, 제네바를 근대적이고 개방적이며 번영하는 도시로 만들고자 하였다.1
이 비판에는 일리가 있었다. 프라이빗 뱅킹 하우스들은 무엇보다 부유한 고객층을 상대하였고, 그 투자는 대부분 국제적이었다. 제네바의 소규모 기업가들은 신용을 얻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비판은 현실을 단순화한 것이기도 하였다. 프라이빗 뱅커들은 많은 지역 기업의 자금 조달에 참여하였고, 저축은행과 같은 기관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파지의 강령은 여러 요소를 결합하고 있었다. 도시를 에워싸 그 확장을 가로막던 성벽의 철거, 새 시가지의 조성, 발권 및 신용 은행의 설립, 철도의 발전, 외국인과 가톨릭 신자의 수용, 그리고 교육 개혁이 그것이다. 이 강령은 19세기 후반 제네바를 변화시켰다.
파지와 제네바 금융 엘리트 사이의 논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지역 경제의 발전에서 금융 중심지가 수행하는 역할에 관한 질문이다. 국제 자산관리를 지향하는 금융 중심지는 그것이 창출하는 일자리, 세금, 지출을 통해 주(칸톤)의 번영에 기여한다. 그러나 그러한 금융 중심지가 반드시 지역의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것은 아니며, 중소기업은 다른 기관에 의존한다. 프라이빗 뱅크, 주립은행, 상업은행의 공존은 이러한 다양한 수요에 부응하는 것이다.
주석
-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Suisse (DHS), “Fazy, James” 항목(Jean de Senarclens): 제임스 파지(1794–1878)는 1826년 보통선거를 지지하는 야당 기관지로 Journal de Genève를 창간하였고, 이어 제네바 급진주의를 위해 L’Europe centrale(1833)를 창간하였다. 그는 1846년 10월의 급진 혁명을 이끌었고 1847년 헌법을 기초하였다. 그의 경제 강령은 Caisse hypothécaire(1847), Banque de Genève(1848), Caisse d’escompte(1849) 및 Banque générale suisse de crédit international(1853)의 설립으로 이어졌는데, 마지막 은행이 1865년 파산하면서 그는 몰락하였다. 1850년 이후 그는 성벽 철거에 착수하였다. 1864년 그가 정부에 재선되지 못하자 폭동이 일어났고 연방이 개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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