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의 제네바: 재건해야 할 도시
1815년에 탄생한 제네바주(칸톤)는 구 공화국과 뚜렷이 달랐다. 영토는 프랑스와 사르데냐 왕국이 할양한 기초자치단체(게마인데)들로 확대되었는데, 그 주민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다.1 개신교 도시는 이제 상당한 규모의 가톨릭 소수파를 통합해야 했고, 이는 정치적·사회적 균형을 바꾸어 놓았다. 주는 보수적인 헌법을 채택하였는데, 이 헌법은 권력을 명사 엘리트에게 유보하고 재산 자격 요건을 통해 정치 참여를 제한하였다.2
제네바 경제는 프랑스 통치기를 거치며 약화된 상태였다. 파브리크(Fabrique)는 특히 쥐라와 뇌샤텔의 시계 제작자들과의 경쟁이 격화된 환경 속에서 시장을 되찾아야 했다. 날염 옥양목 산업은 쇠퇴하였다. 무역은 자유지대에도 불구하고 제네바를 사부아와 프랑스의 배후지로부터 분리하는 관세 장벽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재산의 상당 부분을 프랑스 정부 연금증권에 투자했던 자본가들은 수입이 녹아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럼에도 제네바에는 자산이 있었다. 교양 있는 엘리트, 온전한 국제적 연결망, 신뢰성에 대한 평판, 그리고 이제 스위스의 중립으로 보호되는 지위가 그것이다. 아카데미, 콜레주, 종합병원(Hôpital général), 경제협회(Société économique) 같은 기관들도 살아남았다. 또한 파리, 런던 등지에 정착한 제네바 가문들은 출신 도시와의 유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산이 금융 중심지의 재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1815년부터 1840년대 초까지의 왕정복고기는 지적·과학적으로 찬란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제네바는 유럽 각지의 학자, 작가, 여행자를 맞이하였다. 호수와 알프스, 그리고 도시의 문화적 명성에 이끌려 관광이 발전하였다. 부유한 외국인들이 제네바에 정착하거나 장기간 체류하면서 제네바 은행가들의 잠재적 고객층을 형성하였다.
핵심. 1815년의 제네바는 경제적으로 약화되었지만, 교양 있는 엘리트, 국제적 연결망, 견실한 제도, 신뢰성에 대한 평판을 유지하고 있었다. 스위스의 중립은 이제 제네바에 이전에는 없던 안전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자산이 금융 중심지의 재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주석
-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Suisse (DHS), “Communes réunies” 항목: 1815년 11월 20일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는 베르수아, 콜렉스보시, 르그랑사코네, 프레니, 베르니에, 메이랭 기초자치단체의 전부 또는 일부(49.3km², 주민 3,343명)를 제네바에 할양하였다. 1816년 3월 16일 토리노 조약으로 사르데냐 국왕은 카루주를 포함한 24개 기초자치단체 또는 그 일부(108.8km², 주민 12,700명)를 할양하였다. 이는 가톨릭 지역으로서 주를 종파적으로 혼합된 곳으로 만들었다. 제네바 측의 협상은 Charles Pictet de Rochemont이 맡았다. ↩
- Ville de Genève, “Entrée dans la Confédération”(geneve.ch): 헌법은 7인 위원회가 초안을 작성하여 1814년 8월 14일 주민투표로 채택되었다. 제네바는 1815년 5월 19일 22번째 주가 되었다.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Suisse (DHS), “Restauration” 항목: 새로운 주들의 헌법은 “제한적인 재산 기반 선거권의 재도입과 행정부의 우월적 역할”로 특징지어졌다. DHS, “Rossi, Pellegrino” 항목(1820년부터 대의원회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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