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피난에서 제2차 피난으로
역사가들은 대개 제네바로 들어온 개신교 난민의 큰 물결을 둘로 구분한다. 제1차 피난(Refuge)은 16세기, 특히 1550년대와 1560년대에 해당한다. 이 시기 프랑스, 이탈리아, 메리 튜더 치하의 잉글랜드, 저지대 국가들에서 벌어진 박해로 수천 명이 칼뱅의 도시로 향했다. 이 물결과 그 영향은 B부에서 서술하였다. 이 물결은 인쇄업, 직물업, 견직업, 금은세공업을 가져왔고, 훗날 제네바 엘리트의 주요 가문이 될 가족들도 함께 데려왔다.
두 물결 사이에 프랑스 개신교도의 처지는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16세기 말 앙리 4세가 공포한 낭트 칙령은 그들에게 제한적인 예배의 자유와 함께 법적·군사적 보장을 부여하였다.1 위그노는 프랑스에 남았고, 그중 다수는 상업, 제조업, 금융업으로 진출하였다. 이는 다른 직업의 문이 점차 그들에게 닫혀 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여러 도시와 제네바, 스위스, 저지대 국가들, 잉글랜드 사이에 개신교 상업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1660년대부터 상황은 악화되었다. 루이 14세는 개신교도에 대해 갈수록 적대적인 정책을 펼쳤다. 직업 금지, 예배당 파괴, 강제 개종이 이어졌고, 특히 “용기병 박해(dragonnades)”가 자행되었다. 이는 개신교도 가정에 병사를 숙영시켜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는 방식이었다.2 이주의 움직임은 낭트 칙령이 폐지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제2차 피난은 1685년 칙령 폐지 이후 절정에 달하였다. 그 규모는 제1차 피난보다 훨씬 컸으며, 제네바는 무엇보다 독일어권 스위스, 독일 국가들(특히 브란덴부르크), 네덜란드 연합주, 잉글랜드로 향하는 경유지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난민 일부는 제네바에 영구히 정착하였고, 이들의 기여는 18세기 제네바 경제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게 된다.
핵심 요점. 제네바는 개신교 난민의 두 차례 큰 물결을 겪었다. 첫째는 칼뱅의 도시를 변모시킨 16세기의 제1차 피난이고, 둘째는 낭트 칙령 폐지에 뒤이은 17세기 말의 제2차 피난으로, 이를 통해 제네바는 위그노 대탈출의 거점이 되었다.
주석
- Didier Boisson, “L’Édit de Nantes et sa révocation (1598-1685)”, Encyclopédie d’histoire numérique de l’Europe (ehne.fr): 1598년 4월 30일의 칙령으로, 양심의 자유와 제한적인 예배의 자유를 부여하고 공직 진출을 허용하였다. 일반 조항 93개, 특별 조항 56개, 그리고 150개의 안전 거점을 포함하는 두 건의 특허장(brevet)으로 구성된다. ↩
- Didier Boisson, “L’Édit de Nantes et sa révocation (1598-1685)” (ehne.fr): 1661년부터 루이 14세는 칙령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려 하였다. 1676년 개종 기금(Caisse des conversions)이 설치되었고, 1681년 지방감찰관 마리야크는 푸아투 지방에서 국왕 용기병의 개입을 얻어 내 “약 3만 건의 개종”을 이끌어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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