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전: 탁자에서 계정으로
제네바 정기시는 분열된 화폐 세계 속에서 열렸다. 그곳에서는 온갖 출처의 금화와 은화가 유통되었다. 피렌체의 플로린, 베네치아의 두카트, 프랑스의 에퀴, 사보이아 주화, 독일 주화, 주교 주화가 그것이다. 이들의 상대 가치는 무게, 순도,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장부를 기록하기 위해 상인과 당국은 계산화폐, 곧 가치를 하나의 공통 척도로 표시할 수 있게 해 주는 추상적 단위를 사용했다. 그리하여 사보이아와 제네바 지역에서는 실제로 주조된 어떤 주화에도 대응하지 않는 경량 플로린이 계산 단위로 쓰였다.1
환전상은 이 세계의 전문가였다. 그들은 정기시 기간 동안 자신의 탁자에 앉아 주화의 무게를 달고, 합금 상태를 확인하고, 수수료를 받고 다른 주화로 바꾸어 주었으며, 상인들에게 결제에 필요한 통화를 공급했다. 그들의 업무에는 정확한 기술적 지식, 상당한 주화 준비금, 그리고 흠잡을 데 없는 평판이 필요했다. 당국은 위조화폐의 유통과 조작을 막기 위해 그들의 활동을 감독했다.
점차 일부 환전상은 활동 범위를 넓혔다. 그들은 예금을 받고, 고객을 위해 계좌를 관리하고, 장부상 이체로 결제를 하고, 신용을 제공했다. 탁자에서 계좌로의 이러한 이행은 예금은행업의 탄생을 의미한다. 환전상에게 계좌를 가진 상인은 주화를 다루지 않고도 구두 또는 서면 지시를 내림으로써 공급자에게 대금을 지급할 수 있었다. 환전상은 한쪽의 계좌에서 차감하고 다른 쪽의 계좌에 입금했다. 양 당사자가 같은 환전상에게 계좌를 두고 있다면, 그 거래에는 주화의 이동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이 체제에는 은행업의 역사 전체에서 발견되는 위험이 따랐다. 환전상이 예금의 일부를 대출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돈을 돌려 달라고 하지 않는 한, 이러한 관행은 수익성이 있었다. 그러나 신뢰의 위기는 예금 인출 쇄도를 불러와 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환전상에 관한 중세의 법령에서부터 바젤 III의 자본 및 유동성 요건에 이르기까지, 은행 규제는 이 위험을 통제하고자 한다.
귀금속의 흐름은 정치적 문제도 일으켰다. 군주들은 금과 은을 자기 왕국 안에 붙잡아 두고자 했다. 이 금속들이 주화를 주조하고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데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기시에서는 외국 산물을 사들이는 대가로 귀금속이 유출되었다. 리옹 정기시를 다룬 항목은, 금과 은의 왕국 밖 유출을 막는 것이 루이 11세와 그 자문회의의 최우선 목표였음에도, 정기시의 성공이 대규모 귀금속 유출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2 국가의 상업적 이익과 통화적 이익 사이의 이러한 긴장은 금융 중심지의 역사 전체를 관통한다. 그것은 20세기의 외환 통제와 자본 도피를 둘러싼 오늘날의 논의에서 다시 나타난다.
주의. 현대 은행가의 모습을 중세 환전상에게 투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활동은 주화의 물리적 취급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그들의 자본은 소규모에 머물렀으며, 그들의 파산은 빈번했다. 예금 및 신용 은행업은 특히 이자부 대출에 대한 교회법상의 금지 때문에 불확실한 법적·도덕적 조건 속에서 점진적으로 출현했다.
주석
-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Suisse(DHS), 항목 “Monnaie”: 16세기 후반 제네바와 보 지방에서는 “사보이아 플로린 또는 경량 플로린”이 리브르를 대신하여 계산화폐가 되었는데, 이는 스위스의 다른 지역에서 사용되던 라인 플로린과 달랐다. Archives d’État de Genève, 페이지 “La monnaie”: 1플로린은 12솔 또는 144드니에, 1에퀴는 4플로린 8~10솔의 가치가 있었다. ↩
- 항목 “Foires de Lyon”, Wikipédia (fr), 앞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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