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이아의 압력 아래 약화된 도시
16세기 초 제네바는 정기시의 오랜 쇠퇴를 거치며 위축된 모습으로 남았다. 인구는 더 이상 늘지 않았고, 교역은 지역 규모로 축소되었으며, 재정은 취약하였다. 도시는 여전히 주교령이었지만, 그곳에서 사보이아 가문의 영향력은 정점에 이르렀다. 1504년부터 재위한 샤를 3세 공작은 제네바를 자신의 영지에 속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만들고자 하였다.1 주교좌는 공작 가문과 연결된 고위 성직자들이 차지하였으며, 대표적인 인물이 1510년대에 주교였던 장 드 사부아이다.2 사보이아의 관리인 비돔(vidomne)이 도시에서 사법 기능을 행사하였다.
사보이아의 압력은 여러 방면에서 느껴졌다. 공작은 행정관 임명을 통제하고, 자신의 관리들의 관할권을 확대하며, 시민들로부터 자신의 주권을 인정받으려 하였다. 제네바의 영역은 거의 전부 사보이아의 영지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공작은 상당한 경제적 압박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도시의 물자 공급을 방해하고, 상인들의 통행을 막고, 통행세를 부과할 수 있었다. 교역으로 살아가는 도시에 이러한 수단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이러한 압력에 직면하여 제네바 사회는 분열되었다. 관직, 연금 또는 혼인 관계로 사보이아 궁정과 묶여 있던 일부 유력자들은 도시의 미래가 공작의 영지로 점진적으로 통합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다른 이들, 특히 스위스 도시들과 교역하던 상인들은 주(칸톤)들에 의지해야만 제네바의 자치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분열은 정치적인 것이었지만 경제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두 가지 상업적 지향과 두 개의 고객 네트워크가 서로 맞섰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는 모든 소규모 금융 중심지가 겪어 온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상업 도시의 지정학적 지향은 대체로 그 교역의 지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프리부르 및 베른과 거래하던 제네바 상인들은 자신들의 교역로와 채권을 보호해 줄 스위스와의 동맹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사보이아의 관직과 은전에 재산의 기반을 둔 이들은 정반대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신념과 이해관계는 사료로는 늘 구분해 낼 수 없는 비율로 뒤섞여 있었다.
주석
- Wikipedia (en), “Charles III, Duke of Savoy”: “1504년부터 1553년까지 사보이아 공작”. 1534년 7월 제네바 기습 공격은 격퇴되었고, 1535년 10월의 두 번째 포위는 베른군의 도착으로 풀렸다. 1536년 프랑스가 사보이아를 침공하였다. 1553년 사망하였고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뒤를 이었다. ↩
- Wikipedia (en), “Jean de Savoie”: “1513년부터 1522년 사망할 때까지” 제네바 주교. 프랑수아 드 사부아의 서자로, 레오 10세가 부여한 권리에 따라 샤를 3세 공작이 임명하였다. 1522년 6월 8일 사망하였다. 그의 임명은 1515년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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