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바젤이었나?
에라스뮈스는 바젤에 정착하기 전에 파리,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런던, 베네치아, 로마, 루뱅 등 여러 도시에서 살았다. 그가 바젤을 선택한 데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바젤은 그가 알던 도시 가운데 가장 크거나 가장 부유한 도시가 아니었고, 궁정이나 큰 대학의 소재지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프로벤의 인쇄소였다. 에라스뮈스에게는 자신의 저작을 신속하고 정확하며 우아하게 만들어 낼 수 있고, 그리스어 활자와 학식 있는 교정자를 갖추었으며, 그의 지시를 기꺼이 따르는 인쇄업자가 필요하였다. 프로벤이 바로 그런 인쇄업자였다. 두 사람의 협력은 1520년대 에라스뮈스가 보여 준 왕성한 저술 활동의 기반이었다. 에라스뮈스와 같은 포부를 지닌 저자는 자신의 인쇄기 가까이에 있어야 했으므로, 바젤은 그에게 적합하였다. 바젤에는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뛰어난 인쇄소가 있었다.
둘째 이유는 지적 환경이었다. 바젤에는 대학, 학자와 교정자들의 모임, 그리고 에라스뮈스를 만나거나 인쇄소에서 일하기 위해 찾아오는 방문객의 끊임없는 흐름이 있었다. 이 도시는 인문주의자 네트워크의 교차로로서 스트라스부르, 프라이부르크, 취리히, 콘스탄츠, 아우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및 저지대 지방과 연결되어 있었고, 편지와 책이 이 중심지들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셋째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바젤은 자유도시이자 스위스 연방의 구성원이었으며, 어떤 군주의 직접적인 통제도 받지 않았다. 에라스뮈스는 자신의 독립을 중시하여 궁정에 매이는 것을 피하였다. 다만 여러 통치자로부터 연금을 받기는 하였다. 바젤에서 그는 도시의 법과 연방의 중립에 보호받으며 사적인 학자로 살 수 있었고, 당대의 갈등에서 모든 편에 선 통치자 및 학자들과 자유롭게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넷째 이유는 개인적인 안락함이었다. 몸이 허약했던 에라스뮈스는 바젤의 고요함, 질서, 상대적인 청결함, 그리고 그곳에서 구할 수 있었던 부르고뉴 포도주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편지에는 독일의 기후, 음식, 난로에 대한 불평도 담겨 있지만, 자신의 보금자리가 된 이 도시에 대한 만족의 표현도 담겨 있다.
이러한 이유들은 스위스 금융 중심지가 2세기 동안 외국 고객과 기관을 유치하기 위해 내세워 온 논거를 예고한다. 서비스의 질, 전문성의 집중, 국가의 독립과 중립, 법의 보호, 그리고 삶의 질이 그것이다. 에라스뮈스는 20세기의 자산관리인이라면 알아보았을 이유로 바젤을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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