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의 가장 유명한 주민
바젤에 살았던 모든 사람 가운데 당대에 로테르담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보다 더 유명한 사람은 없었다. 1466년 또는 1469년경 로테르담에서 태어나 공동생활형제회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로 서품된 그는 16세기 첫 수십 년 동안 유럽에서 가장 이름 높은 학자가 되었다. 그가 펴낸 신약성경과 교부 저작의 판본, 격언집과 대화집, 풍자문, 그리고 교육·정치·종교에 관한 논고는 포르투갈에서 폴란드까지, 스코틀랜드에서 이탈리아까지 읽혔다. 교황, 황제, 국왕들이 그의 호의를 구했고, 유럽 전역의 학자들은 그에게서 받은 편지 한 통을 영예로 여겼다.1
에라스뮈스는 요한 프로벤 인쇄소의 명성에 이끌려 1514년 처음으로 바젤에 왔다. 그는 1516년에 출간된 신약성경 판본과 히에로니무스 저작의 인쇄를 감독할 만큼 오래 머물렀다. 그는 여러 차례 다시 찾아왔고 1521년에 이 도시에 정착하여 1529년까지 살았다. 1529년 바젤에 종교개혁이 도입되자, 그는 합스부르크 지배 아래 있던 가톨릭 도시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로 이주하였다. 1535년 그는 마지막 저작들의 인쇄를 감독하기 위해 바젤로 돌아왔고, 1536년 7월 12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대성당에 묻혔으며, 그의 묘는 지금도 볼 수 있다.2
이 장은 에라스뮈스와 바젤을 한 중심으로 하는 인문주의자 네트워크를 에라스뮈스 연구 문헌에서는 흔치 않은 관점, 곧 돈, 평판, 정보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에라스뮈스는 학자이자 도덕가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펜과 후원자들의 너그러움으로 생계를 꾸린 저술가였다. 그는 자신의 수입을 관리하고, 돈을 국경 너머로 송금하며, 경쟁적인 사상 시장에서 자신의 평판을 지켜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이끈 인문주의자 네트워크는 정보와 평판의 네트워크로서, 여러 면에서 당대의 금융 네트워크처럼 기능하였다. 그리고 돈, 전쟁, 조세, 군주의 의무에 관한 그의 견해는 금융 중심지의 윤리에 놀라울 만큼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석
- 에라스뮈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표준적인 전기(예: Huizinga, Erasmus, 1924; Halkin, Érasme parmi nous, 1987)를 참조하라. 그의 바젤 시절에 관해서는 HLS, 항목 “Erasmus von Rotterdam”을 참조하라. 출생 연도에는 논란이 있다(1466/1469). ↩
- 에라스뮈스의 바젤 거주 기간(1514–1516년 간헐적; 1521–1529년; 1535–1536년), 1529년의 프라이부르크 이주, 1536년 7월 12일 바젤에서의 사망 및 대성당에 있는 그의 묘에 관해서는 HLS, 항목 “Erasmus von Rotterdam”을 참조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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