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와 네덜란드인
두 번째이자 더 큰 규모의 피난민 물결은 16세기 후반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에서 왔다. 1562년에 시작된 프랑스 종교전쟁은 수천 명의 위그노를 망명길로 내몰았고, 이어 1572년 8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대규모 탈출을 불러왔다. 위그노들은 주로 그들의 주된 피난처가 된 제네바로 갔지만, 바젤, 베른, 로잔, 스트라스부르, 팔츠, 영국으로도 갔다. 저지대 국가에서는 1567년 이후 스페인 당국의 개신교도 탄압과, 1585년 안트베르펜 함락으로 정점에 이른 남부 주들의 재정복으로 인하여 수만 명의 개신교도가 북부 주들, 영국, 그리고 독일과 스위스로 떠났다.1
1585년 안트베르펜 함락은 유럽 경제사의 전환점이었다. 안트베르펜은 북유럽의 으뜸가는 상업·금융 중심지였고, 그렇기에 그곳의 상인들은 국제 무역과 금융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이들에 속했다. 그들의 이주로 자본, 기술, 네트워크가 유럽 무역과 금융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암스테르담으로,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쾰른, 런던, 바젤을 비롯한 여러 도시로 옮겨 갔다. 안트베르펜 디아스포라는 유럽 역사에서 인적·금융 자본의 거대한 이전 가운데 하나였다.
저지대 국가나 프랑스에서, 흔히 프랑크푸르트나 다른 독일 도시에 머문 뒤 바젤로 온 여러 가문이 그다음 세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수학자들을 배출한 베르누이 가문은 안트베르펜 출신이었다. 드 바리 가문은 투르네 출신이었다. 자라신 가문은 로렌 출신이었다. 바티에 가문은 프랑스 출신이었다. 파사방 가문은 부르고뉴 출신이었다. 미빌 가문은 프랑슈콩테 출신이었다.2 이 가문들은 국제 무역의 경험,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지식, 그리고 유럽 개신교 상인 네트워크와의 연결을 가지고 왔다.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에서 온 피난민들은 섬유 산업의 새로운 분야도 도입했다. 그들은 비단 직조, 리본·레이스·장식끈 생산, 염색, 그리고 양말과 기타 편직물 제조의 기법을 가지고 왔다. 길드가 조직한 양모와 아마포의 전통적 섬유 산업을 가지고 있던 바젤은 그들을 통하여 그 뒤 수 세기 동안 도시에 부를 안겨 줄 산업들을 얻게 되었다.
주석
- 1562년과 1572년 이후의 위그노 이주, 그리고 1567년과 1585년 이후 남부 네덜란드로부터의 이주에 관하여는 근세 개신교 디아스포라에 관한 문헌 참조. ↩
- 피난민 출신 바젤 가문들의 기원(안트베르펜 출신 베르누이, 투르네 출신 드 바리, 로렌 출신 자라신, 프랑스/부르고뉴 출신 바티에와 파사방, 프랑슈콩테 출신 미빌)에 관하여는 스위스 역사사전(HLS)의 각 가문 항목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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