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베티아 혁명과 구질서의 종말
길드 헌정과 도시귀족 정부를 갖춘 바젤의 구질서는 1798년 헬베티아 혁명으로 종언을 고하였다. 주목할 점은 이 혁명이 부분적으로 바젤 엘리트층의 한 구성원에 의해 준비되고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1752년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Peter Ochs는 시의 최고 행정관인 Oberstzunftmeister였으며, 프랑스 혁명을 흠모한 계몽주의자였다. 1797년 그는 파리로 가서 프랑스 총재정부와 협상하였고, 프랑스 측의 요청에 따라 단일 스위스 공화국을 위한 헌법을 기초하였다.1
1798년 1월, 프랑스의 스위스 침공에 앞서 바젤은 평화적 혁명을 단행하였다. 시는 그 영역의 농촌 주민에게 정치적 평등을 부여하고, 시민과 길드의 특권을 폐지하며, 새 헌법을 채택하였다. 바젤은 자발적으로 구질서를 폐지한 최초의 스위스 주(칸톤)였다. 몇 주 후 프랑스군이 스위스를 침공하여 다른 주들의 정부를 전복하고, 프랑스 공화국을 본뜬 중앙집권 국가인 헬베티아 공화국을 강요하였다. 그 헌법은 대체로 Ochs의 초안에 기초한 것이었다.
헬베티아 공화국은 겨우 5년 동안 존속하였다. 이 공화국은 인기가 없었고,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었으며, 프랑스 점령 비용에 짓눌렸다. 1803년 나폴레옹은 이를 조정법(Act of Mediation)으로 대체하여 주들과 연방 구조를 복원하였다. 많은 스위스인에게 조국을 프랑스에 넘겨준 반역자로 여겨진 Ochs는 바젤 정치에서 계속 활동하기는 하였으나 영향력을 잃었다. 그의 평판은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는데, 이들은 그를 1848년 스위스 연방국가의 선구자로 본다.
헬베티아 혁명은 바젤의 경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첫째, 길드의 독점을 폐지하고 원칙적으로 영업의 자유를 도입하였다. 다만 길드는 1803년 이후 일부 특권을 되찾았다. 둘째, 봉건적 공과금과 십일조를 원칙적으로 폐지하되, 유상 상환을 조건으로 하였다. 셋째, 농촌 주민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농촌이 도시에 형식적으로 종속되던 상태를 끝냈다. 넷째, 몇 년 동안 스위스의 통화와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19세기의 경제 근대화를 준비하였다.
주석
- 바젤의 Oberstzunftmeister였던 Peter Ochs(1752–1821), 1797년 그의 파리 사행 및 헬베티아 공화국 헌법 초안(1798)에 관하여는 스위스 역사사전(HLS), “Ochs, Peter” 항목을 참조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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