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 신앙고백
바젤 개혁교회는 신앙고백으로 자신의 교리를 정하였다. 제1 바젤 신앙고백은 외콜람파디우스가 기초하고, 그의 사후 후계자 오스발트 미코니우스가 완성하였으며, 1534년 시 참사회가 채택하였다. 그것은 주요 쟁점에 관한 개혁파의 교리를 제시한 짧고 온건한 문서였다. 1536년 스위스 개혁파 도시들의 대표들은 바젤에 모여 제1 스위스 신앙고백을 기초하였다. 제2 바젤 신앙고백으로도 알려진 이 문서는 루터파와의 협상에서 스위스 개혁교회들의 공동 입장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1
외콜람파디우스는 자신의 업적이 공고해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1531년 11월, 가톨릭 주(칸톤)들이 취리히를 격파한 카펠 전투에서 츠빙글리가 전사한 지 몇 주 후에 사망하였다. 카펠의 패배는 연방 내 종교개혁의 확산을 끝내고, 19세기까지 지속된 교파 간 균형을 확립하였다. 취리히, 베른, 바젤 및 샤프하우젠 등의 도시와 일부 영역은 개혁파가 되었고, 내륙 주들과 그 밖의 몇몇 주는 가톨릭으로 남았다. 이로써 연방은 종교적 경계를 따라 분열되었다. 1531년의 제2차 카펠 화약은 각 주가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2
연방의 교파 분열은 경제적 결과를 가져왔다. 개혁파 주와 가톨릭 주는 외국 열강과의 관계, 용병업에 대한 태도, 노동과 부에 관한 문화가 서로 달랐다. 개혁파 도시들, 즉 바젤, 취리히, 제네바, 베른 및 샤프하우젠은 이후 수 세기 동안 교역, 산업 및 은행업의 중심지가 되었던 반면, 가톨릭 주들은 주로 농업에 머물렀고 용병업에 의존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사이의 연관성에 관한 명제를 뒷받침하는 데 이용되어 왔으며, 다음 장은 이 명제를 살펴본다.
주석
- 제1 바젤 신앙고백(1534년, 외콜람파디우스/미코니우스) 및 제1 스위스 신앙고백(제2 바젤 신앙고백, 1536년)에 관하여는 HLS, “Basler Bekenntnis” 및 “Helvetische Bekenntnisse” 항목 참조. ↩
- 제2차 카펠 전쟁(1531년 10월), 츠빙글리의 사망, 외콜람파디우스의 사망(1531년 11월 23일) 및 제2차 카펠 화약(1531년 11월)에 관하여는 HLS, “Kappelerkriege” 및 “Oekolampad, Johannes” 항목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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