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중의 BIS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국제결제은행(BIS)은 미묘한 처지에 놓였다. 주주에는 양측 교전국의 중앙은행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사회에는 독일,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중앙은행의 총재들이 있었다. 직원들은 여러 나라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 소재지는 전쟁에 둘러싸인 중립국에 있었다. BIS는 중립 선언을 채택하여 한 교전국에 유리하고 다른 교전국에 불리할 수 있는 거래를 피하기로 약속하였으며, 전쟁 기간 동안 이사회 회의를 중단하였다.1
전쟁 기간 대부분에 걸쳐 BIS의 총재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은행가인 토머스 매키트릭이었다. 그는 1940년에 취임하여 1946년까지 재임하였다. 그의 지휘 아래 BIS는 축소된 인력으로 바젤에서 계속 운영되었으며, 양 진영의 중앙은행들과 거래를 하였다. BIS는 영 플랜 차관에 대한 이자 지급금을 독일로부터 계속 수령하여 채권 보유자들에게 이전하는 한편, 독일 제국은행(Reichsbank)과 금 거래도 수행하였다.2
전쟁 중 제국은행이 BIS에 인도한 금에는 점령국, 무엇보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중앙은행들로부터 약탈한 금과,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포함한 개인들로부터 빼앗은 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BIS는 이 금의 출처를 조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일부는 종전 시점에도 BIS의 금고에 남아 있었다. 전후 BIS는 그 약탈된 출처를 인정하여 1948년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일정량의 금을 연합국에 반환하였다.3
1944년 7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창설한 브레턴우즈 회의는 노르웨이 대표단이 제안하고 미국이 지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 결의는 가능한 한 조속히 BIS를 청산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 결의에는 BIS가 독일에 협력하였다는 의혹과, 브레턴우즈의 새로운 기구들로 인해 BIS가 불필요해질 것이라는 견해가 반영되어 있었다.4 그러나 이 결의는 끝내 이행되지 않았다. 유럽의 중앙은행들, 무엇보다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은 BIS를 유럽 통화 협력에 유용한 기관으로 옹호하였다. 전후 BIS는 유럽 통화의 태환성 회복을 위하여 1950년에 창설된 유럽결제동맹의 대리인이 되었다. 브레턴우즈 이후 BIS가 존속한 것은 1932년에 이어 새로운 기능을 찾아내는 이 기관의 역량을 보여 주는 두 번째 사례이다.
주석
- 1939년 12월 BIS의 중립 선언과 제2차 세계대전 중 이사회 회의의 중단에 관하여는 Toniolo, 2005 참조. ↩
- 1940년부터 1946년까지 BIS 총재를 지낸 토머스 H. 매키트릭과 제국은행과의 금 거래를 포함한 전쟁 중 BIS의 활동에 관하여는 Toniolo, 2005; 독립전문가위원회(Independent Commission of Experts)의 보고서 참조. ↩
- 전쟁 중 BIS가 제국은행으로부터 받은 약탈 금과 1948년 연합국과의 협정(3국 금 위원회, Tripartite Gold Commission)에 따른 그 일부 반환에 관하여는 Toniolo, 2005; 독립전문가위원회의 보고서 및 나치 금에 관한 미국 정부의 보고서(Eizenstat reports, 1997/98) 참조. ↩
- BIS를 “가능한 한 조속히” 청산할 것을 권고한 브레턴우즈 연합국 통화금융회의(1944년 7월)의 결의 V. Toniolo, 2005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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