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와 관용의 문제
개혁파 세계는 관용의 세계가 아니었다. 칼뱅의 제네바는 1553년 10월 스페인의 의사이자 신학자인 미카엘 세르베투스를 이단으로 처형하였다. 이 처형은 그리스도교 당국이 이단자를 죽일 권리가 있는가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목소리는 바젤에서 나왔다. 제네바 학교의 교장을 지냈으나 칼뱅과 갈등을 빚은 뒤 그 도시를 떠난 프랑스 인문주의자 Sebastian Castellio는 바젤에서 Oporinus의 교정자로, 이후에는 대학의 그리스어 교수로 살았다. 1554년 그는 가명으로 이단자 박해에 반대하는 글 모음집 『De haereticis an sint persequendi』, 곧 『이단자는 박해받아야 하는가』를 출간하였다. 그는 또한 세르베투스 처형을 옹호한 칼뱅의 글에 대한 반박문을 썼는데, 이는 1612년에야 인쇄되었다.1
이 반박문에서 Castellio는 관용의 원칙을 밝힌 고전적 명제 가운데 하나가 된 문장을 썼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문장이다. 그는 어떤 인간 권위도 신앙 문제에서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정당화할 만한 확실성을 주장할 수 없고, 신앙은 강제될 수 없으며, 이견자에 대한 박해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반한다고 주장하였다. Castellio의 논거는 즉각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지만, 이후 종교의 자유 사상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Castellio가 바젤에 있었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다. 이 도시는 개혁파로서 도덕적 규율을 시행하였지만, 공공연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한 제네바나 다른 곳에서 살 수 없었던 이견자들의 존재를 용인하였다. Castellio, 이탈리아 망명자 Celio Secondo Curione와 Bernardino Ochino, 그리고 비정통적 견해를 지닌 다른 이들은 바젤에서 피난처와 인쇄소를 찾았다. 제한적이고 때로는 불안정했던 이러한 상대적 관용은 바젤을 개혁파 세계에서 지적 자유의 장소로 만들었다. 그것은 금융 중심지에 필요한 개방성의 역사에 속한다.
여러 나라, 문화, 종교의 고객을 끌어들이려는 금융 중심지는 그들에게 안전, 예측 가능성, 그리고 사적인 일에 대한 존중을 제공해야 한다. 금융 중심지는 고객에게 자신의 종교나 정치를 공유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바젤이 16세기에 불완전하게나마 실천한 다양성에 대한 관용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이 도시의 상업적·금융적 성공의 조건이 되었다. 그것은 또한 오늘날에도 핵심적인 질문, 곧 이 관용의 한계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였다. 금융 중심지가 자신이 용인하지 않는 활동을 하는 고객의 돈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사생활 존중과 불법행위 가담 사이의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제E부에서 살펴보는 자금세탁, 제재, 정치적 주요 인물에 관한 근대의 규칙들은 이 경계선을 법적인 용어로 긋는다.
주석
- Sebastian Castellio(1515–1563)와 그의 바젤에서의 활동, De haereticis an sint persequendi(1554, Martinus Bellius라는 가명으로 출간) 및 Contra libellum Calvini(1554년 집필, 1612년 인쇄)에 관해서는 스위스 역사사전(HLS), “Castellio, Sebastian” 항목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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