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금 은행에서 중앙은행가들의 클럽으로
BIS의 본래 존재 이유였던 배상금은 1931년 6월의 후버 모라토리엄으로 붕괴하였고, 1932년 로잔 회의로 사실상 종결되었다. BIS는 기능을 찾는 기구로 남았다. BIS는 정관에 규정된 둘째 과제인 중앙은행 간 협력의 증진을 발전시켰고, 총재들이 매달 만나 금본위제의 문제, 1930년대 초의 은행 위기, 그리고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외환 통제를 논의하는 장소가 되었다. 전쟁 기간, 1939년의 체코 금 이전, 그리고 은행의 청산에 관한 1944년 브레턴우즈 결의는 D부에서 설명하였으므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1
전후의 전환은 유럽지급동맹(European Payments Union)에서 시작되었다. 유럽경제협력기구(OEEC)의 회원국들이 무역수지를 다자적으로 결제하기 위하여 1950년에 이 동맹을 창설하였을 때, 이들은 BIS를 그 대리기관으로 지정하였다. 은행은 계정을 관리하고, 각국의 월별 포지션을 계산하며, 결제를 집행하였다. 이 과제는 BIS를 유럽 통화 문제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았고, 기술적 역량에 대한 명성을 안겨 주어 남아 있던 청산 요구를 잠재웠다. 1958년 말 유럽 통화들이 태환성을 회복하자 이 동맹은 해산되고 유럽통화협정(European Monetary Agreement)으로 대체되었으며, BIS는 이 협정에서도 다시 대리기관으로 활동하였다.2
바젤의 총재 회의는 이 시기에 BIS에 “중앙은행가들의 클럽”이라는 이름을 안겨 준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유럽 주요 중앙은행의 총재들은 한 달에 한 번 바젤에서 만났으며, 1960년대부터는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일본은행 및 캐나다은행의 대표들도 함께하였다. 그들의 회의는 비공식적이고 비밀스러웠으며, 공개되는 의사록이 없었고 공식적인 결정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회의 뒤에는 만찬이 이어졌고, 그 자리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BIS의 역사가인 Gianni Toniolo는 이러한 비공식성이 어떻게 총재들로 하여금 신뢰를 쌓고, 공식적인 정부 간 협상의 제약 없이 위기 시에 신속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였는지를 서술하였다.3
주석
- D부 제V장의 “The crisis of 1931”, “The Czech gold”, “The BIS during the Second World War” 및 “The BIS after the war” 절을 참조. 후버 모라토리엄과 로잔 회의에 대해서는 Toniolo, 2005, 제4장 및 제5장을 참조. ↩
- 유럽지급동맹과 유럽통화협정, 그리고 대리기관으로서 BIS의 역할에 대해서는 Toniolo, 2005, 제8장 및 Jacob J. Kaplan and Günther Schleiminger, The European Payments Union: Financial Diplomacy in the 1950s, Oxford, 1989를 참조. ↩
- 바젤 월례 회의와 총재들 사이의 비공식 협력 문화에 대해서는 Toniolo, 2005, 제9장 및 제10장을 참조. 연방준비제도의 참여에 대해서는 1960년대 미국 통화외교에 관한 문헌도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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