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 항의, 그리고 자본의 이동성
『Institutio』는 한 망명자가 써서, 그의 동료 신자들을 박해하던 국왕에게 바친 책이었다.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친 헌사는 관용을 청하며 개신교도가 충성스러운 신민이라고 주장하였다. 관용이 거부되자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훗날 경제학자 Albert Hirschman이 이탈(exit)과 항의(voice)라는 용어로 묘사하게 될 선택에 직면하였다. 머물러서 항의하거나 저항하거나 순응할 수도 있었고, 떠날 수도 있었다.1 칼뱅 자신은 이탈을 택하였고, 이후 한 세기 반에 걸쳐 수십만 명의 위그노도 그러하였다. 그 정점은 1685년 낭트 칙령 폐지 이후의 대규모 이주였으며, 자매편은 이를 제2차 피난(second Refuge)으로 서술한다.
이탈은 자본에게도 하나의 선택지였다. 망명자들은 가져갈 수 있는 재산은 모두 가지고 떠났고, 떠날 수 없었던 이들은 때때로 안전을 위해 자본을 해외로 보냈다. 박해받는 소수자가 자신의 부를 지킬 수 있게 한 국경을 넘는 자본의 이동성은 근세 초기 유럽 개신교 금융 네트워크의 토대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또한 통치자의 권력을 제약하였다. 가장 생산적인 신민을 박해하는 국왕은 그들의 부와 기술을 경쟁국에 빼앗길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 폐지는, 그 경제적 비용은 결정을 내린 국가가 부담하고 그 이익은 망명자를 받아들인 국가들에 돌아간 정치적 결정의 예로 자주 거론된다. 망명자를 받아들인 국가에는 스위스 도시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네덜란드, 영국이 있었다.
자본의 이동성은 여전히 근대 금융의 핵심 문제이다. 국가들은 조세 제도, 재산권의 법적 보호, 정치적 안정을 통해 이동성 있는 자본을 두고 경쟁하며, 자본은 가장 좋은 대우를 받는 곳으로 이동한다. 스위스 금융 중심지는 두 세기 동안 이 경쟁의 혜택을 누려, 자국에서 몰수, 인플레이션, 전쟁 또는 과도한 과세를 두려워한 이들의 자본을 받아들였다. 유해 조세 관행에 관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작업에서 필라 2(Pillar Two)의 글로벌 최저한세에 이르기까지, 제E부와 제G부에서 살펴보는 탈세와 유해 조세 경쟁에 대한 국제적 조치들은 자본의 이탈 선택지를 제한하려는 시도이다. 16세기와 17세기에 자신의 부를 바젤과 제네바로 가져간 개혁파 망명자들은, 근대 국가들이 규제하려는 선택지를 행사한 것이다.
주석
- Albert O. Hirschman, Exit, Voice, and Loyalty. Responses to Decline in Firms, Organizations, and States, Cambridge (Mass.) 19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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