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룬과 중국
바젤 선교회는 골드코스트와 인도를 넘어 활동을 넓혔다. 1847년 선교회는 중국 남부 광둥성의 객가어 사용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교회,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바젤 선교회가 세운 객가 교회는 중국 혁명의 격변 속에서도 여러 형태로 살아남았다. 홍콩, 타이완, 말레이시아와 그 밖의 나라로 이주한 교인들은 그 전통을 이어 가는 교회를 세웠다. 홍콩에서는 바젤 선교회가 세운 숭진회(Tsung Tsin Mission)가 지금도 객가 공동체의 활발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남아 있다.1
중국 선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바젤을 중화권과 연결한다. 바젤의 선교사들은 객가어를 연구하였고, 문법서와 사전을 저술하였으며, 성경을 객가어로 번역하였다. 그들은 중국 남부의 사회를 보고서와 사진으로 기록하였는데, 이 자료는 Mission 21의 기록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그들은 중국인 목사, 교사와 의사를 양성하였고, 그 가운데 일부는 중국의 근대화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15년간 거주한 필자는 동남아시아의 객가 공동체에서 이 역사의 흔적을 접하였다.
카메룬이 독일 식민지가 된 뒤인 1886년, 바젤 선교회는 독일어권 선교회를 선호한 독일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이 식민지에서 영국 침례교 선교회의 사업을 인수하였다. 카메룬의 바젤 선교회는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카메룬이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분할되자, 선교회는 영국이 관할하는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 갔다. 바젤 선교회가 세운 카메룬 장로교회는 오늘날 이 나라 영어권 지역의 주요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2
카메룬에서 바젤 선교회의 활동은 독일 식민 지배라는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아래에서 선교회와 식민 당국의 관계는 긴밀하였다. 이 관계는 비판적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연구는 식민 질서에서 선교회가 한 역할, 원주민에 대한 선교회의 태도와 식민지 폭력에 대한 선교회의 대응을 검토하였다. 스위스 선교회가 독일 식민주의에 관여한 사실은 스스로 식민 국가를 갖지 않은 스위스의 기관들이 어떻게 다른 국가들의 식민 사업에 참여하였는지를 보여 준다.
주석
- 중국의 바젤 선교회(1847년부터, 광둥성의 객가인 사이에서)와 홍콩의 숭진회(Tsung Tsin Mission)에 관하여는 중국 바젤 선교회의 역사에 관한 문헌을 참조. ↩
- 카메룬의 바젤 선교회(1886년부터)와 카메룬 장로교회에 관하여는 바젤 선교회에 관한 문헌을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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