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 취리히, 제네바: 세 종교개혁의 비교
바젤의 종교개혁은 취리히 및 제네바의 종교개혁과 비교할 수 있다. 이 두 스위스 도시 역시 종교개혁이 이후 금융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형성하였다. 이 비교는 공통된 특징과 중요한 차이를 드러낸다.
취리히는 그로스뮌스터의 민중 사제였던 울리히 츠빙글리의 지도 아래 1523년부터 1525년 사이에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이 과정은 시 참사회가 주도하였다. 시 참사회는 1523년 공개 논쟁을 개최한 다음 개혁을 단계적으로 도입하였다. 이처럼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시민 당국이 종교개혁가와 긴밀히 협력하며 이끈 질서 있는 과정이었다. 츠빙글리는 종교 개혁을 정치·사회 개혁과 결합하여 용병업과 외국 열강이 지급하는 연금을 공격하였다. 그는 취리히를 연방 내 개혁파 동맹의 지도자로 만들고자 하였다. 1531년 카펠에서의 그의 죽음은 이 야망을 끝냈다.1
제네바는 베른의 지원을 받아 주교와 사보이아 공작에 맞선 오랜 투쟁 끝에 1536년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종교개혁은 프랑스 출신 종교개혁가 기욤 파렐, 이어서 칼뱅이 이끈 이 도시의 독립 투쟁의 일부였다. 1541년 이후 칼뱅이 조직한 제네바 교회는 취리히와 바젤의 교회보다 시민 당국으로부터 더 큰 자율성을 누렸다. 그 장로회(콘시스토리)는 엄격한 도덕적 권징을 행사하였다. 자매편이 서술하듯이, 제네바는 국제 칼뱅주의의 중심지이자 프랑스 프로테스탄트의 피난처가 되었다.
바젤은 무장한 길드의 압력 아래 취리히보다 늦고 제네바보다 이른 1529년에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이 과정은 취리히보다 덜 질서 있었고, 제네바에 비하여 독립 투쟁과의 연관성이 적었다. 수년간의 망설임 끝에 시 참사회가 길드에 굴복한 후, 종교개혁은 성상 파괴와 도시 내부의 권력 이동을 수반하였다. 바젤 교회는 취리히 교회와 마찬가지로 시 참사회의 통제 아래 있는 국가교회였다. 자율적인 교회 권징을 확립하려던 외콜람파디우스의 시도는 부분적으로만 성공하였다.
세 도시는 이후의 경제 발전을 형성한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하였다. 개혁파 국가교회, 노동과 절약을 장려한 도덕적 권징, 시민적 목적을 위한 교회 재산의 세속화, 교육에 대한 투자,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망명자에 대한 개방성이 그것이다. 한편 세 도시는 서로 달랐다. 취리히는 스위스 고원과 동부 스위스를, 제네바는 프랑스와 위그노 세계를, 바젤은 라인강과 독일어권 개혁파 영역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지향은 각 도시의 금융 중심지로서의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취리히는 스위스 상업은행업과 증권거래소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네바는 위그노 프라이빗 뱅킹의 중심지, 그리고 나중에는 국제 자산관리와 원자재 트레이딩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바젤은 산업금융과 중앙은행 업무를 위한 국제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취리히와 제네바에 관한 자매편들은 나머지 두 경로를 살펴본다.
주석
- 취리히의 종교개혁(1523년 1월과 10월의 논쟁, 1525년 미사 폐지) 및 츠빙글리의 정치적 프로그램에 관하여는 HLS, “Reformation” 및 “Zwingli, Ulrich” 항목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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