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과 보불전쟁
1870년과 18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전쟁을 바젤의 문 앞까지 가져왔고, 이 지역의 정치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1870년 여름과 가을, 독일군은 스트라스부르를 포위하였고, 그 주민들은 심한 포격에 시달렸다. 바젤, 취리히, 베른의 시민들이 조직한 스위스 대표단은 포위군으로부터 시내의 민간인을 대피시킬 수 있는 허가를 얻어 냈다. 1870년 9월 스트라스부르 주민 수천 명이 포위된 도시에서 빠져나와 바젤과 그 밖의 스위스 도시들에 수용되었다.1 1863년 제네바에서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창설된 지 몇 년 뒤에 일어난 이 사건은 유럽의 전쟁에 대한 스위스 인도적 개입의 초기 사례였다.
1871년 2월 부르바키 장군이 이끄는 패전 프랑스군 8만여 명이 쥐라 지방에서 스위스 국경을 넘었고, 스위스에 억류되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스위스에서 무장해제되고 식량과 보살핌을 제공받았다. 억류 비용은 이후 프랑스가 상환하였다.2 부르바키 군대의 억류는 스위스 인도주의적 중립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루체른에 보존된 파노라마 회화로 기념되고 있다.
1871년 프랑크푸르트 강화조약은 알자스와 로렌 일부를 새로 성립한 독일제국에 넘겼다. 바젤에게 이는 경제적·가족적으로 긴밀한 유대를 맺어 온 서쪽 이웃 알자스가 독일 영토가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스위스와 프랑스 사이의 국경이 서쪽의 쥐라 지방으로 옮겨 가면서, 바젤은 두 방면에서 독일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1871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의 알자스 통치는 이 지역을 독일 경제와 관세 체계에 편입시켰고, 이는 바젤과 알자스 배후지 사이의 교역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알자스는 프랑스로 반환되었고, 이로써 바젤 지역의 3국 접경 구도가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주석
- 1870년 9월 스트라스부르 포위 당시 스위스의 인도적 개입과 민간인의 바젤 및 그 밖의 스위스 도시로의 대피에 관하여는 HLS, 항목 “Deutsch-Französischer Krieg”; 1870/71년 스위스 인도적 활동에 관한 문헌 참조. ↩
- 1871년 2월 부르바키 장군 휘하의 프랑스 동부군(약 8만 7,000명)의 스위스 억류와 프랑스의 비용 상환에 관하여는 HLS, 항목 “Bourbaki-Armee”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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