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만니족, 프랑크족과 중세 초기 도시
5세기에 라인강 상류의 로마 지배는 붕괴했다. 알레만니족이 강 양안에 정착했으며, 클로비스가 496년경과 506년경에 알레만니족을 격파한 뒤 이 지역은 프랑크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클라인바젤과 도시 주변의 중세 초기 묘지들, 그 가운데 베르너링의 대규모 묘지는 6세기와 7세기에 알레만니족과 프랑크족 주민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1 로마화된 주민과 게르만계 정착민이 점차 융합되면서 이 지역의 언어는 알레만어 계열의 독일어가 되었고, 그 상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바젤 서쪽 약 30킬로미터 지점의 쥐라와 준트가우를 지나는 독일어와 프랑스어의 언어 경계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뮌스터 언덕 위의 도시는 주교좌이자 수공업과 교역의 작은 중심지로 명맥을 이었다. 보덴호의 라이헤나우 수도원장이자 카를 대제의 고문이기도 했던 하이토 주교는 9세기 초에 대성당을 재건했다.2 카를 대제는 811년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로 파견했는데, 이는 바젤 주교들이 제국 엘리트층에 속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바젤은 카롤링거 제국에 속했고, 제국이 분할된 뒤에는 중프랑크 왕국에, 이후에는 상부르군트 왕국에 속했다.
917년 헝가리 기마병들이 바젤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주교를 살해했다. 도시는 서서히 회복되었다. 1006년 부르군트 왕 루돌프 3세는 바젤을 독일 왕 하인리히 2세에게 양도했고, 1032년 루돌프가 사망한 뒤에는 부르군트 왕국 전체가 제국으로 넘어갔다. 훗날 성인으로 시성된 하인리히 2세는 바젤의 위대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주교구에 토지와 권리를 기증했고, 1019년 새 대성당의 봉헌식에 참석했다. 그는 오늘날에도 바젤에서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그의 모습은 대성당과 그가 기증한 황금 제단 전면 장식에 새겨져 있다. 이 제단 장식은 현재 파리의 클뤼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3
황금 제단 전면 장식은 중세 초기 교회가 수행한 경제적 역할을 상기시킨다. 교회의 보물은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필요할 때 담보로 잡히거나 녹여 쓸 수 있는 귀금속 비축분이기도 했다. 주교와 수도원은 최대의 토지 소유자이자 가장 중요한 대주와 차주였으며, 십일조, 통행세, 시장, 주조권 등 수입을 낳는 권리의 보유자였다. 다음 장에서는 바젤 주교들이 이러한 권리를 어떻게 행사했는지, 그리고 이러한 권리가 점차 시민들에게 이전되면서 어떻게 도시 경제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주석
- 바젤의 중세 초기 묘지들(베르너링, 클라인휘닝겐, 고터바름베크)에 관해서는 HLS(Historisches Lexikon der Schweiz), 항목 “Basel (Gemeinde)”의 중세 초기 부분; Archäologische Bodenforschung Basel-Stadt의 간행물 참조. ↩
- 하이토 주교(약 763–836년, 약 805–823년 바젤 주교, 라이헤나우 수도원장)에 관해서는 HLS, 항목 “Haito” 참조. ↩
- 하인리히 2세와 바젤, 1006년의 양도, 1019년 10월 11일의 대성당 봉헌 및 황금 제단 전면 장식(현재 파리 클뤼니 박물관 소장)에 관해서는 HLS, 항목 “Heinrich II.” 및 “Basler Münster” 참조. ↩
일반적인 정보 제공만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글은 법률 또는 세무 자문에 해당하지 않으며, 개별 사안에 대한 자문을 대체하지 않고, 변호사와 의뢰인 간의 위임 관계를 성립시키지 않습니다. 이 글은 2026년 10월 기준의 법적 상황을 반영합니다.